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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May 17. 2024

걸어서 생일 속으로

세계여행 중 생일이 오면

작년에는 부산에서 생일을 보냈는데 올해는 이스탄불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우리는 유랑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하기 때문에 이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는 기념일이나 생일에 큰돈을 지출하지 않기로 했다. 세계여행을 떠나온 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 올해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호캉스도, 내가 좋아하는 향수 선물도 없다. 대신 낯선 나라의 낯선 동네를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처음 알게 된 음식을 먹고, 처음 알게 된 디저트를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걸 물어보면 난 항상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이맘때면 속초로, 부산으로, 보성으로 떠났다. 호기심이 많은 내게 이런 여행이 바로 명품선물이다. 그런 내가 세계여행을 떠나왔으니!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데이트로 보이는 하루겠지만 나에게는 꿈에 그려온 생일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일기를 써야겠다.


<오늘의 일기>

-언제: 2024년 봄

-어디서: 튀르키예 이스탄불

-날씨: 왜 흐리고 난리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감성 터지는 인간인데 하필 내 생일에 하늘은 얄짤없이 잿빛이다. 살짝 섭섭했지만 이대로 질 수 없지. 오랜만에 모자를 벗고 머리스타일을 신경 썼다. 몇 벌 없는 옷 중 아껴두었던 맨투맨까지 꺼내 입었더니 다행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내 생일 만세!!!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러 큰길로 나가려는데 쫙 깔린 경찰들이 가방 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거.. 뭐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 오늘 이 동네에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한다. 통제된 도로에는 수많은 경찰차와 구급차가 대기 중이었다. 뭔가 무서워지려고 하는 기분도 잠시. 세상에나, 당연히 버스도 없자나! 원래는 버스를 타고 선착장에 가서 배를 타려고 했다. 오늘 한참 걸을 것 같으니 시작은 버스로 체력을 아끼려고 했지만 역시 계획대로 되는 건 없다. 선착장까지 가는 길이 다 통제되었다. 결국 1시간을 걸어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번화가로 갈수록 유난히 사람들이 넘쳐 났다. 걷기도 힘들 정도여서 검색을 해보니 오늘이 '국가 주권 및 어린이의 날'이란다. 튀르키예 국민들이 다 튀어나온 것 같았다.

오늘은 배를 타고 '아시아지구'에 가기로 했다. 처음 가보는 동네인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전혀 다른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우리가 머무는 동네는 중장년층이 많고, 관광객은 거의 없으며, 도로는 비교적 깨끗하고, 복장만 봐도 독실한 무슬림이 많이 보인다. 반면 아시아지구는 관광객도 많고, 젊은 사람들도 많고, 복장도 다양하다. 건물도 다르고, 들리는 노래도 다르다. 물론 도로는 더 지저분하지만. 이때부터 신이 나기 시작했다.


"우와 이미 여행 중인데 또 여행 온 것 같다."

(좌) 우리 동네, (우) 아시아지구

평소에 외식을 하면 걷다가 배고픈 지점에서 구글맵을 켜고 메뉴와 적당한 평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오늘은 무려 내 생일이지 않은가. 계획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는 K가 나만 따라오라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큰 식당에 데려갔는데 여기가 유명한 베이란 집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터키식 육개장이라고 알려져 있는가 보다. 베이란을 주문하니 루꼴라와 레몬이 나왔다. 근데 포크가 없네? 옆에 앉은 튀르키예 사람이 손으로 먹는 거라고 알려준다. 주섬주섬 손으로 채소를 뜯어먹고 있자니.. 기분이 요상했다. 흐흐. 그다음에는 빵 한 소쿠리와 베이란이 나왔다. 악! 너무 맛있자나!! 이거 뭔데!!!!! 빵도 쫄깃쫄깃하고 베이란은.. 베이란은 그냥 맛있다. 느끼할 줄 알았는데 노노. 많이 짤 줄 알았는데 노노. 적당히 짭조름하고 약간 칼칼한 맛이 끝에 남는 고깃국? 아, 그래서 육개장이라고 했구나. 너무 맛있어서(식당 가기 전 2시간 정도 걸은 건 비밀) 싹싹 비웠다. 대만족.

본의 아니게 과식을 해버렸네. 이제 또 걸어야겠다. 고양이가 유난히 많고 예쁜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카페거리를 왔다. 우리는 라떼를 좋아하는데 이스탄불에서 몇 번의 대실패를 겪은 후부터 라떼를 끊고 지냈다. 하지만 오늘은 무려 카페거리에 왔지 않나. 마음에 드는 카페를 고르고 용기를 내서 라떼를 주문했다. 후기는.. 없다..

아기자기한 거리를 걷다 보니 탁 트인 뷰가 나타났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둘이 한참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헛소리지만, 이스탄불에서 이탈리아 얘기하고 있지만 ㅋㅋㅋ K와 나누는 이런 두서없는 대화가 제일 재밌다. 낯선 나라의 낯선 동네에서 실컷 걷다가 바다를 바라보며 K와 깔깔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이번 생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순간이다.

저녁이 되니 곳곳에서 열리는 공휴일 행사 때문에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내향적인 우리는 일주일치 에너지를 다 뺏긴 기분이었다. 힘을 내... 인파를 뚫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디저트 가게다. 우리는 튀르키예가 이 정도로 디저트에 진심인 나라인지 몰랐다. 관광지뿐 아니라 주택가에도 디저트 가게가 많고 가게마다 손님들이 적지 않다. 종류도 엄청 다양하고, 보기만 해도 뇌를 때리는 당분이 느껴진다. 평소에 디저트를 즐기지 않지만 그래도 경험해 봐야지!

1864년부터 영업 중이라는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찾았다. 조금씩 맛볼 수 있는 바클라바 세트와 터키 아이스크림, 홍차를 주문했다. 심각하게 달 수 있다고 굳게 마음먹어서인지 오히려 맛있게 먹었다. 피스타치오가 유명한 만큼 아낌없이 듬뿍 들어 있어서 견과류가 팍팍 씹힌다. 의외로 지금까지 생각나는 건 쫀득한 아이스크림이다. 맛은.. 사실 별다른 맛이 있는 건 아니다. 식감이 쫄깃하고 은은한 우유맛이 느껴져서 달달한 디저트랑 잘 어울렸는데 이게 가끔 생각난다.

눈치챘을 수 있지만 우리는 뭔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여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 디저트 가게의 지점이 하도 많아서 검색을 해봤더니 유명하고 맛있는 집이었다. 알아보는 건 여기까지다. 거기서 뭘 먹을지는 가서 생각한다. 둘이 세상 진지하게 메뉴판을 보며 의논하고 종업원에게 질문도 하고 열심히 고르는데 옆에 있는 커플이 도움이 필요하냐며 말을 걸어왔다. 튀르키예에서 현란한 영어라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알고 보니 런던에 살고 있는 튀르키예 사람이었다. 친절한 도움, 정말 고마웠어요!


사람 터지는 어느 나라 어린이날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K의 손을 꼭 잡고 모르는 동네를 25,000보나 걸었다. 처음 보는 음식을 먹고, 종업원에게 외워둔 튀르키예 제스처도 써봤다. 어벙해질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했다. 대통령 방문으로 차가 통제된 도로를 걷다가 남대문 시장보다 3배나 사람이 많은 시장을 만났다. 수많은 향신료 가게, 이불가게, 그릇가게, 견과류가게, 짝퉁인 줄 알았던 외관이 허름한 버거킹까지 모두 신기했다. 종점에서 버스도 탔고, 큰 배도 탔다. 바다뷰가 계속 펼쳐지는 공원도 걸었다. '못잡겠쥐~'로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의 고급 버전도 먹었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기다리는 내 생일, 올해 대성공이다.


매일매일 생일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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