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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Sep 06. 2022

이윤은 착취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읽고

1.

소쉬르의 패착은, 문자를 2차적인 것으로, 음성을 가두는 매체(그릇)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의 그런 착각(?)은 소쉬르가 표음문자를 쓰는 서구 사회 안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일본에서의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를 고려했다면, 그의 이론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전)경제학자들 또한 화폐를 2차적으로, 상품과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교환 자체가 상품과 화폐의 관계를 일컬음에도, 마치 상품과 상품 간 물물교환이 본질이고 기원이라는 생각은 원근법적 도착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화폐가 생기기 전에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고, 그 후에 화폐가 나타났다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교환이라는 발상 자체는 먼저 화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

(고전)경제학자들은 공황을 예외적인 상황, 없어야 할 트러블이라 생각하지만 그 또한 오류다. 화폐-상품-화폐의 끊임없는 교환을 통해 화폐가 자본으로 도약할 수 있는데, 사실 상품이 다시 화폐가 되는 단계는 이해할 수 없는 비약(=목숨을 건 비약)이다. 그 비약이 가능한 토대야말로 자본이 성립가능한 전제조건이다.


공황은 상품이 화폐로 비약하는 데 실패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공황을 발생시키는 토대와, 자본을 성립시키는 토대는 사실상 동일하다. 어쩌면 공황이 보편적이고 자본이 희귀한 케이스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인 세상에 살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공황을 예외로 이해하는 맥락을, 프로이트가 초기에 신경증 환자를 특이 케이스로 이해한 점과 유비할 수 있다. 신경증을 유발하는 토대가 바로 무의식인데, 그 무의식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보편적 토대임을 발견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물구나무 선 심리학을 바로세워 정신분석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공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과 토대를 이해하는 것이 곧 근대사회의 메커니즘과 토대를 이해하는 방법이겠다. 그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물구나무 선 경제학을 바로세우려 했던 게 아닐까.



3.

역사를 움직이는 이념, 신의 섭리, 시대정신 등은 역사라는 텍스트의 배후에 상정된 ‘상상적 주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주체와 초월성을 배제/부정할 때 비로소 경제적 하부구조가 발견된다.


역사가 그렇듯 철학 또한 이데올로기이다. 그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는 차이성을 들춰내는 것이 사상이다. 그러므로 근대에는 계급적 차이성을 은폐하는 곳에서 자유·평등이라는 가치가 성립한다. 반대로 말하면 자유·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계급적 차이성을 은폐하는 것이 근대철학이다. 지금의 사상은 그 은폐를 드러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역사와 철학이라는 관념/이데올로기를 걷어내야 계급성,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4.

그런데 정말 계급성이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해 자본을 이해할 수 있는가. 자본이야말로 국가와 화폐와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에서 성립하는 것 아닌가. 자본만큼 종교적인 것이 또 있을까. 자본이라는 허구적 상부 구조가 오히려 현재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하부구조를 결정지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철학을 비평하는 작업과, 자본을 이해하는 일은 별개가 된다.



5.

절대적인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초월성을 전제하기에 형이상학적이다. 애초에 의미/가치가 근본적으로 체계 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본다면, 모든 체계를 벗어난 완벽한 바깥에서 의미/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완벽한 객관성 성립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객관성이라는 믿음만큼 상대적인 것도 없다. 진정한 객관성은 또다른 ‘상대성’임을 인지하는, 그 괴리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성 또한 타자(다른 체계)와의 조우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6.

1848년 프랑스에서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갑분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유를 초월성의 기준에서 생각해 보자. 초월성은 현실 레벨에서의 차이를 없앰으로써 가능하다. 가령 A B C라는 3개의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A와 B가 대립관계라면, A도 B도 상위 레벨로 도약할 수 없다. A가 도약하면 B와의 관계 때문에 상하 구분이 불가할 것이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직 C만이 상위 레벨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당시 선거 후보에서 C에 해당한 것이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7.

화폐는 어떻게 자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으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업자본은 공간적 차이를 통해 잉여가치를 발생시킨다. A라는 공동체(체계)가 있고 B라는 공동체가 있다면, c라는 상품이 A 체계와 B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각각 다르다. 그 위상의 차이만큼, A 체계와 B 체계에서 c의 교환가치는 다를 것이다. 그 차이만큼 잉여가치가 남는다.


산업자본은 시간적 차이를 통해 잉여가치를 발생시킨다. 마르크스주의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가가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남기는 게 아니다. 그들은 고전경제학자들과 똑같은 토대 위에서 생각한다. 가치란 노동력의 응고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노동력이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화폐의 성립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철학) 자유와 평등이다. 그러므로 노동에서 가치가 비롯한다는 생각은 화폐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도착(倒錯)이다.


산업자본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상품을 생산하는 시점의 체계와 상품을 판매하는 시점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상품이, 만들어진 시점에서는 A, 판매되는 시점에는 A+B의 가치를 부여받는 체계에 있기 때문에 B만큼의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이 종말하지 않는 이상, 시점은 무한히 뒤로 밀릴 것이고, 시점이 밀릴 때마다 체계는 바뀔 것이다. 바뀐 체계 간에 가치의 차이는 늘 발생할 것이기에 산업자본은 무한히 성립 가능하다.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은 위의 발상을 그대로 독서에 적용한 것이리라. 작가가 책을 쓰는 시간과, 독자가 책을 읽는 시간은 다르다. 그 말은 작가가 책을 쓰는 시점의 체계와, 독자가 책을 읽는 시점의 체계가 다름을 뜻한다. 의미는 체계 내의 차이화에 의해 결정되므로, 작가의 메시지와 독자의 독해는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만다. 같은 책이어도 작가와 독자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자리잡게 된다. 독서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계는 바뀔 것이니, 그때마다 같은 책이라도 의미/가치는 달라진다.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이 생각한, 마르크스에 관한 무궁무진한 독해 가능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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