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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12. 2022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 요약

1.

음성이 먼저고 문자가 나중이라는 생각은 도착(倒錯)이다. 아주 먼 과거에는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의 우리가 쓰는 언어는 ‘음성→문자’가 아니라 ‘문자→음성’이라고 봐야 옳다.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루소와 헤르더를, 그리고 데리다를 비판한다. 루소와 헤르더는 ‘국어의 기원’을 물었어야 했음에도 ‘언어의 기원’이라는 문제의식을 설정했다.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쓰는 각 국어를 음성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 음성 언어들을 태초부터 있었던 근원으로서 전제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었다.


데리다는 서양철학을 음성중심주의라며 비판했었는데, 사실 음성중심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최근의 현상이었다. 그런 것을,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을 찾았으니 데리다 또한 아예 번짓수를 잘못 짚었다. 그런데 그 데리다의 엉뚱한 기원 찾기에서 가라타니는 음성중심주의란, 제국이 해체하고 개별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파악한다.


로마 오스만 인도 중국 등의 제국이 분해되고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베트남 등의 국가들이 생길 때, 지금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베트남어 등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해왔던 자연 언어인 양 형성되었듯이, 고대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대항해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나타났을 때에도 각 지역 언어들이 태어났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평행한 징후였음에도, 데리다는 고대 그리스의 사례를 기원으로, 현재 모습을 그 결과로 해석한 데에서 함부로 인과율의 잣대를 들이댄 셈이다.



2.

마르크스의 진의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엉망으로 왜곡해왔듯, 소쉬르의 속뜻은 소쉬르주의자들이 망쳐왔다. 우리는 랑그를 흔히 국어의 문법이나 체계로서 이해하지만, 실은 랑그란 거대하고 단일한 하나의 법칙이나 시스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가령 하나의 국어 안에도 무수한 랑그가 존재한다. 각 지역의 방언도 랑그이고, 급식체도 랑그이다.


소쉬르가 랑그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언어를 국어와 떼어내서 생각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프랑스어는 사실 프랑스라는 국가와는 독립적인 레벨로 생각해야 각각에 대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스위스인이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공용어는 프랑스어다. 그런데 그렇다고 프랑스어가 스위스의 국어는 아니다. 소쉬르는 프랑스 귀화를 거부하고 제네바로 돌아감으로써 언어와 국가를 떼어내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마치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그랬듯, 앤더슨과 사이드와 가라타니 본인이 그렇듯 말이다.



3.

칸트 이전의 철학에서는 가상을 초래하는 것이 감각이고, 감각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에 대해 칸트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지와 가상을 초래하는 건 오히려 이성이라는 점이었다. 인간이 처한 현실의 문제들을 이성을 통해 이론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월권이자 독단이라고 칸트는 비판했다. 현실의 문제는 이성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제안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이성 비판]에 이어 [실천이성 비판]을 따로 집필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과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가상이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라는 의도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앤더슨 또한 민족이 환상이므로 민족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려던 게 아니다. 오히려 둘의 진의는 정반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믿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민족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한 견지로서 말이다.



4.

가라타니는 근대국가를 ‘국가와 자본의 결혼’ + ‘민족과 국가의 결혼’으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근대국가란 민족=국가=자본의 삼위일체이다. 자본주의 이전에 저 셋은 각각 따로 존재했었다. 국가는 영주-기사와 영주-농노라는 수탈과 재분배의 원리로서. 민족은 영주의 성 안에 존재하는 여러 농업공동체 내부의 상호부조적이고 호혜적인 질서로서. 자본은 성과 성 바깥의 도시 사이의 교환으로서. 그랬던 것이 각각 얽히고 섥혀 한몸이 된 것이 근대사회(=자본주의)이다.


그러므로 자본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을 강조하거나 국가를 강조하는 대안은 헛짓이다. 민족을 강조한 최악의 사태가 나치즘과 같은 파시즘이었고, 국가를 강조한 최악의 사태가 소련 같은 국가사회주의였다. 꼭 최악으로 가지 않더라도 민족과 국가의 강조는 결국 자본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어느 것도 해법이 될 수 없다.



5.

홉스의 자연상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추상적 가정이라는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영국 왕이 뒷방 늙은이가 된 청교도혁명 이후에 나온 저작이라는 점을 근거로, 어쩌면 홉스는 의회 정치를 비판하고 절대왕정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보수파로 해석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그에 대해 가라타니는 홉스의 자연상태는 추상적 가정이 아니라 홉스 시대에 대한 직접적 비유이며, [리바이어던]을 오히려 의회 정치의 미래에 대한 제언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 개인은 특정 종교를 꼭 믿을 필요가 없고 믿는 척만 하면 된다고 홉스가 쓴 부분에 가라타니는 주목한다. 그 말은 곧, 사람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다를 수 있으며 따라서 알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홉스는 오히려 인간의 표리부동한 면모야말로 민주 정치의 토대임을 지적한 셈이다. 사적으로는 A 정책을 선호하고 P 후보를 지지하지만, 공적으로는 반대의 정책을 내세우고 투표와 선거에서 다른 후보를 찍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 괴리야말로 민주 정치의 가능성이라고 홉스는 말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가 가라타니가 재해석한 홉스이다.


여기서 다시 가라타니는 홉스가 지적한 민주 정치의 그러한 전제야말로 민주주의의 대표성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홉스의 자연상태를 투표 당일 유권자들의 모습으로 재해석한다. 비밀투표가 유지되는 현재의 무기명 투표 방식이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고 가라타니는 본 것이다. 그때 유권자들은 자신의 진짜 속마음과 다른 투표를 행사할 수도 있으며, 또한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없는 비밀투표이므로 그 결과 당선인은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을 대표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이것이 대의제의 비극이다.


그에 대해 가라타니는 투표가 아닌 추첨 방식을 제안한다. 어차피 투표도 추첨도 실제 민의를 대의할 수 없는 거라면, 실질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방식이 추첨이며, 추첨을 통해 시스템이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근거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소환한다.



6.

칼 포퍼는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을 비판하며 현대 정치는 의회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함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것은 사실 어리석은 분석이었다. 왜냐하면 의회제 민주주의의 부정적인 결과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였기 때문이다. 포퍼는 의회제 민주주의와 파시즘을 정반대의 노선이라 생각했지만, 파시즘은 의회제 민주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수많은 도착점 중에 하나이다. 비유하자면, 자동차 사고를 염려하면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자동차를 탈 것을 권하는 꼴과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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