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민 Mar 15. 2023

빨간 아이

얼굴도 마음도

3살 언니가 빨간 아기를 바라보는 사진을 못 찾아서 대신 올리는 독사진

 나는 태어날 때 빨갰다. 갓 태어난 아기는 원래 빨갛다. 그런데 나는 계속 빨갰다. 몸이 씻겨지고 하얀 보자기에 싸여 보송보송할 때도 빨간 채 보송했다.    

 

 내 가장 어릴 적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억난다. 그 사진을 꽤 좋아한다. 3살 여자 아기가 바닥에 엎드려서 갓 태어난 동생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담겼다. 사진 속 갓난아기는 절인 방울토마토처럼 빨간 채 축 늘어져 있다.    

  

 태열은 아토피로 번졌다. 살과 살이 닿는 부위에 발진이 생기고 진물이 흘렀다. 아기는 가려웠는지 엄마 품에서 도리도리 하며 진물이 난 양볼을 엄마의 가슴에 비볐다. 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엄마의 표정에는 매번 안타까움과 사랑스러움이 묻어난다.

      

 기억이 남기 시작한 5살쯤부터는 붉은 기가 사라졌다. 아토피는 여전했다. 팔꿈치 안쪽이나 무릎 안쪽이 짓무르고 몸 곳곳이 가려웠다. 어릴 적 모습이 찍힌 비디오를 보면 5살 아이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도 자꾸 일어나서 한쪽 팔을 들고 겨드랑이를 긁는다. 그래도 얼굴에는 붉은 기가 사라진 모습이다.

      

 나는 알고 보니 하얬다. 붉은 기가 사라진 내 피부결은 하얀색이었다. 그 시절 나는 귀여운 외모로 언니 친구들의 예쁨을 독차지했다. 언니 친구들은 같이 밥을 먹거나 놀이터에서 놀 때도 서로 나를 옆에 두려고 경쟁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내 양팔에 팔짱을 끼고 나를 두고 다투기 일쑤였다. 내 인생에 다시 누려보지 못할 인기였다. 5살부터 초등학교 때를 외모 리즈 시절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집 나간 줄 알았던 붉음은 긴 시간 내 안에 숨어있을 뿐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나는 다시 빨개졌다. 얼굴은 늘 붉었고 양볼에는 여드름이 올라왔다. 오르막길을 20분 정도 걸어 오르는 등굣길의 마지막엔 어김없이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중1 때 반 평균 성적이 꼴찌라는 이유로 전체 얼차려를 받은 뒤 얼굴이 시뻘게지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담임 선생님 차에 실려 집에 간 적도 있다.  

   

 숨겨왔던 나의 붉음을 처음으로 여러 사람에게 노출하게 됐다. 중3 담임 선생님은 조회 시간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가냐'며 걱정하셨다. 이른바 '술톤'을 지닌 중학생이라니. 길거리를 걷다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나를 보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늘 술톤인 채 살기란 다소 불편했지만 부끄럽진 않았다. 붉은 얼굴과 달리 나는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학생이었다. 붉음을 오히려 개성으로 활용했다. 고등학교 때 얻은 '붉은 덩어리'라는 별명을 꽤 좋아했다. 친구들이 나를 보며 빨갛다고 신기해하는 반응도 즐겼다. 그 시절엔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빨간색이라고 답했다. 사실 남색이나 민트색 등 푸른색 계열을 더 좋아했는데 말이다.     


 30대가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빨갛다. 민낯으로 거리를 걷다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보고 놀란다.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 사람치고 피부 화장은 꼬박꼬박 하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럽지 않다. 모르는 사람들을 놀래지 않으려는 배려 넘치는 분칠일 뿐이다. 친한 친구들, 연인과 함께 있을 때는 대체로 민낯으로 지낸다. 술 먹다가, 박장대소하다가, 대화하다 흥분해서 얼굴이 새빨개져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붉은 나를, 빨간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가 빨간 채로도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은 빨간 마음에 있다. 내 속을 붉게 물들여놓은 엄마의 붉은 사랑 덕분이다.      


 우리 엄마의 사랑 표현 방식은 독특하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글로 옮기려고 보니 독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어릴 때 자주 하시던 말이 몇 가지 있다.      


"영민이는 엄마의 뭐? 반짝반짝~ 액세서리~" 아마 보석이라는 의미였을 거다. 딸을 장신구로 취급하는 그런 독특함은 아니었다.

"엄마는 영민이의 뭐? 딸랑딸랑~"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꼭 양손을 흔들어 보이셨다. 딸이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엄마는 너의 종, 노예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거다.

"다시 엄마 배에 품고 싶어." 엄마 품에 늘 두고 싶다는 의미로 보인다. 딸을 세상에서 소멸시키고 싶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


 부연 설명이 필요한 애정 표현이었지만, 당시 나는 엄마의 각기 다른 표현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영민이를 무조건 사랑해."


 엄마의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나는 세상 모든 엄마의 사랑은 모두 무조건적인 줄 알았다. 나아가 모든 사랑이 원래 무조건적인 줄 알고 자랐다. 꽤 많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많은 종류의 사랑에 조건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사회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겪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랑받는 일에 익숙했던 나는 나를 좋아하는 이성이 나타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누군가 자기를 좋아하면 '왜 나를 좋아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꽤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알아볼 줄 아는 걸 테니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착각은 했다. 물론 나를 알아볼 만한 눈이 없어도 내가 암컷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얕은 만남을 겪으며 깨달았다.


 이제는 다 기억나지 않는 연애를 하고 숱하게 차이면서도 내 자애감과 자존감은 떨어지지 않았다. 내게 이별을 고하는 사람에게 나는 즉시 반감을 느꼈다. 나를 차는 사람은 나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별 뒤 긴 시간 동안 슬픔에 허우적댄 적도 없다.


 자기를 좋아하는 걸 당연히 여기고, 자기를 싫어하면 바로 '정뚝떨'이 가능한 사람이라니. 써놓고 보니 공주병 같다. 하지만 나는 연애할 때 공주 모시듯 받들어지는 걸 좋아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이미 엄마에게 충분히 받들어져서 다소 귀찮아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집에 가면 엄마는 거실에 틀어져 있는 TV 대신 내 얼굴을 바라보고 계신다. "엄마는 영민이 보는 게 더 재밌어" "엄마는 영민이만 봐도 배불러." 치와와처럼 크고 아련한 눈동자에서 나오는 사랑의 빔을 느끼며 나는 애써 TV 화면을 본다. 믿기 힘들겠지만 주인과 반려견의 이야기가 아닌, 33세 딸과 62세 엄마의 이야기다.     


 엄마의 사랑을 넘치게 받은 덕분인지 나는 '사랑꾼'으로 자랐다. 사랑을 받기보다 주는 데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주기에 마땅한 사람을 찾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꽤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할 때 너무 많은 조건을 따졌고, 너무 많은 심리적 기제나 호르몬 작용에 휘둘렸다. 이른바 '밀당' 같은 심리 게임 없이, 현실적인 조건 따짐 없이, 마냥 마음을 퍼주는 사람에게 똑같이 같은 마음을 퍼주는 사람을 찾는 일. 나에게는 소울메이트이자 인연을 찾는 기적과도 같은 꿈이었다.

      

 10여 년을 방황한 끝에 나는 인연을 찾아냈다. 아무런 조건도 심리 게임도 없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완전한 인연이다. 내가 찾은 상대가 정말 인연임을 확신한 계기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상대를 사랑하는 내 모습이었다. 이전 연애에서도 사랑꾼이라 자부해 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바라보는 내 모습에서 엄마가 보였다. 엄마한테 받은 눈빛을 연인에게 보내고, 엄마한테 받은 애정 담긴 말을 연인에게 했고, 엄마한테 받은 붉은 사랑을 연인에게 쏟았다. 비로소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랑꾼이 된 것이다. 인연을 찾은 뒤 더욱 엄마의 사랑이 애틋해지고 감사해진 걸 보면, 나는 그동안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내 빨간 얼굴도 사랑하고, 내 빨간 사랑도 버거워하지 않는 인연을 만난 뒤 '모든 게 엄마의 사랑 덕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엄마를 향한 애정 표현은 거의 이모티콘에만 의존했던 내가 문득 엄마의 사랑에 대한 찬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다.

     

 최근 나도 엄마가 됐다. 아이가 건강하길 기원하다가 자연스럽게 '내 아이도 나를 닮으면 빨갛게 태어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큰 걱정으로 번지진 않았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만큼 나도 아이에게 쏟는다면, 아이는 나처럼 빨간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빨간 사랑으로 넘치는 '사랑둥이'가 될 테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