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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건 Jul 08. 2022

우울의 바다에 표류하기 전에: 그 바다에 대하여

0일 차. 침묵의 장기, 정신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많이들 부른다. 병환이 악화되는 동안에도 아무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침묵의 장기는 정신이다.

우울증을 앓은 지 10년째. 나는 이제 정신을 장기로 분류한다.


하지만 정신을 장기라고 생각지 않으실 분들이 있을 듯해 상황을 하나 준비했다. 상상을 해보자.

우리는 면접을 보러 왔다. 우리가 미치도록 붙고 싶은 곳이다. 처음 보는 낯선 면접관들과 마주 보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지며 목소리가 떨린다.


앞의 상상 속 면접은 일상적이고 단발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나 지속적인 우울로 정신에 손상이 오면 구토나 어지러움, 인지장애, 발작 등이 찾아오며 우리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망까지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았다.


장기에 질환이 생기면 신체적인 증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리고 정신병은 명백한 신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정신을 실존하고 있는 장기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병은 다른 장기에 일어나는 병과 달리 CT 나 MRI, 피검사, 엑스레이로 절대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정신병이 있는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걷고 뛰고 대화하고 등교하고 시험을 보거나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해서 승진할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잠시 우울하고 게을렀을 뿐 우울증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야. 라며 다시는 정신클리닉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울 수치가 피검사로 증명 가능했다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더 간단했으리라 생각한다.


신체적 수치가 부재하기에, '정신병으로 인한 활동의 불능'에 대해 '정신력'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우울증이 현대인의 감기로 자리 잡은 뒤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병보단 정신력을 의심한다. 심지어 내원하여 명확한 정신병 진단을 받은 뒤에도 병을 부정하기도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이 ADHD나 우울증 등으로 진단받아도 전문의의 치료를 무시하고는 한다.


그러나 정신병은 분명히 치료해야 할 환부가 있는 병이다.

나의 생각이 바로 정신병이 시작되는 곳이다.

병은 암세포가 장기에서 장기로 퍼져나가듯 생각에서 출발해 정신의 곳곳으로 번진다. 관점, 성격, 발화 방식, 결정 과정, 생활 루틴, 일상, 일상에서 비롯되는 미래까지 모두 집어삼켜버린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그 무엇도 신체적인 수치로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증세가 상당히 진행됐을 때에도 '정신병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거나 '성격이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정신병 안아키'로 컸다.

겉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더더욱 내 정신병을 믿지 않았다. 내 자해를 목격한 가족도 있었지만, 자해는 충동적으로 벌인 사건일 뿐 평소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고 생각하고 결론내리든지 나는 정신병자였고, 정신병자다.

명확하게 질병코드도 있다. F32. 우울에피소드. Depressive episode.


'정신병 안아키'인 채로 나의 일상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나 괴로웠다.

편하게 잠을 자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꾸준히 엄마를 설득했다.


스물두 살 여름. 나는 마침내 정신병원에서 약을 받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고틴정을 먹고 얼마나 편했는지 기억난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꿈과 가위 없이 잤다.

열네 살. 아버지의 폭력으로 우울증이 시작된 이후, 팔 년 만에 맞는 편안한 밤이었다.

어떤 충동도 날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십 년 이상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지금도 생활을 조심해야 한다.

우울해질 만한 일은 피하고, 여행을 적게 가고, 체력을 아껴야 한다.

당뇨병 환자가 식단을 조심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일찍 내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병이 자신의 '정신' 그 자체가 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엄마는 나를 일찍 내원시키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


다소 내원이 늦기는 했으나 나는 좋아지고 있었고, 일상생활은 쉬워졌다.

내가 경도 우울에피소드로 가벼운 불면증에만 시달리고 있던 스물네 살 겨울.


아버지가 수능을 망치고 온 동생을 발로 걷어찼다.

그렇게 나는 내 동생의 질병코드까지 받아보게 되었다.

F33.2 재발성 우울장애, 현존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중증과 비전형적 우울증(Atypical depression)에 ADHD, 망상장애를 진단받았다.

상황은 최악이었고 가족 중 나만이 정신병 경험자였다.

나는 그렇게 우울증 환자에서 우울증 고문위원으로 승진했다.


동생은 '정신병 풀아키(FULL로 약 써서 아이 키우기)'를 시도해보았다.

가족의 지지와 응원부터 설득, 상담, 약물치료, 경두개 자기자극술, 스프라바토, 정신과 응급실, 정신병원 입원까지.


이제는 모든 가족들이 사람들이 나에게 우울증과 정신병에 대해 묻고 조언을 구하고 답을 기다린다.

가족들은 내가 약 없이 우울과 망상과 자해중독과 자살사고에서 벗어난 일이 얼마나 희망이 되는지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정신병 안아키'로 살았던 시간이 가족들에게는 이제 '희망과 믿음'이 된 것이다.

'결건이는 약 없이도 버텼으니까, 약과 치료만 있다면 분명히 더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모든 가족들이 내가 우울증의 바다를 표류했던 경험에서 나오는 위로와 조언과 방향성을 믿는다.


그 믿음은 사실이다.


내 경험이 가족들 뿐 아니라 모두에게 그런 희망이 되었으면 하여 '당신의 우울증 표류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나의' 표류기가 아닌 이유는 우울증은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을 일, 당신이 받게 될 치료, 당신이 겪게 될 미래에 관해 미리 알리고 싶다. 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우울증을 앓게 된다. 그리고 우울증은 정신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울증은 다른 모든 병과 같이 '그냥' 당신에게 찾아왔을 뿐이다.

우울증을 앓을 때의 당신이 이 글을 통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얻는다면, 내원할 힘이 생긴다면, 당신의 고통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울의 바다'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러면 내가 '정신병 안아키'로 고통받았던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내 정신에 우울증이 자리잡았음을 깨달았던 순간, 그 후 안아키로 살던 고통, 안아키로 살며 정신을 유지했던 방법, 동생이 받았던 치료와 그 치료의 부작용들을 모두 말해주겠다.

이 모든 경험을 말해주고 싶은 이유는 그 누구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됐든지 간에 이 글을 발견한다면 서둘러 내원하여 고통의 시간을 줄이기를 바란다.

받아 마땅한 벌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이 내가 우울의 바다를 표류하면서 알게 된 단 하나의 희망이자 진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표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모두 동의해야 하는 사실 하나를 확실히 말하고 출발하겠다.

정신은 병이 자랄 수 있는 '실존하는 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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