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정상인가
국민 절반이 신용점수 900점 이상이라면, 그건 건강한 금융이 아니라 점수의 붕괴다. 신용은 사회의 혈관과 같고, 점수는 그 혈관을 진단하는 혈압계다. 그런데 정부가 선거 때마다 반복하는 ‘신용 사면’은 혈압계를 고장 내놓고 “환자는 건강하다”고 우기는 꼴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개인 신용은 차갑고 잔인한 데이터였다. 카드 대란을 거치며 ‘연체 = 낙인’의 공식이 뿌리내렸다. 누군가는 집을 팔고, 누군가는 가족을 등지며 빚을 갚았다. 그 고통을 뼈저리게 기억하는 세대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세 번의 대규모 신용 사면이 단행됐다. 2021년 250만 명, 2024년 290만 명, 그리고 올해는 무려 324만 명이 기록을 지웠다. 기준도 느슨해졌다. 과거엔 2000만 원 이하였다가 이제는 5000만 원 이하 연체까지 ‘한 번 지워줄게’라는 식이다.
그 결과는 숫자로 드러난다. 국내 양대 신용평가사인 NICE와 KCB에서 각각 46.9%, 44.2%가 900점을 넘는다. 사실상 절반이 최상위 신용자로 분류되는 기현상이다. 대출 창구에서 “944점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점수는 더 이상 아무런 변별력이 없다. 은행 입장에선 리스크를 가늠할 수 없으니 담보를 더 요구하거나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금융 시스템의 정밀도가 무너지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실 채무자들의 박탈감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똑같은 조건에서 빚을 자력으로 갚아낸 사람이 361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단 한 번의 사면도 받지 못했다. 장기간 생활을 쥐어짜며 원금을 갚고, 연체 기록이 지워지길 묵묵히 기다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부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치적 명분은 “재기의 기회를 준다”였지만, 실제로는 “성실하게 갚은 자와 버틴 자의 차이는 없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그 순간 성실은 조롱거리가 된다.
신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사회의 계약 정신을 반영하는 약속이다. 약속을 깨도 시간이 지나면 기록이 사라지고, 표를 의식한 정부가 다시 지워주길 기대하는 풍토가 정착한다면, 금융은 신뢰 위에 세워진 산업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인질로 전락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 어렵게 구축한 신용 평가 시스템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 금융은 투명하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지금처럼 신용점수의 상향 평준화가 계속된다면, 해외 투자자들의 시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신용 데이터는 믿기 어렵다.” 그 순간 금리는 오르고, 조달 비용은 치솟으며, 국민 모두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
더 위험한 건, 이런 조치가 ‘정권마다 반복되는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10만 명에서 시작된 사면은 문재인 정부 250만 명, 윤석열 정부 290만 명을 거쳐 이제는 이재명 정부에서 324만 명 규모로 커졌다. 정치의 시간이 금융의 시간을 갉아먹은 것이다. 이제 국민은 선거철마다 “또 한 번 지워줄 테니 표를 달라”는 유혹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정말로 신용 사면이 서민을 위한 제도인가, 아니면 표를 얻기 위한 값싼 포퓰리즘인가. 정말로 금융 취약층을 돕고 싶다면, 사후적 사면이 아니라 사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갑작스런 실직이나 질병으로 연체가 시작되지 않도록 지원하고, 채무 조정 절차를 더 신속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진짜 대책이다. 신용 사면이라는 ‘지우개 정치’는 숫자를 바꿀 뿐,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한다.
900점이 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겉보기엔 따뜻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가짜 온기다. 성실한 땀의 가치는 깎이고, 금융의 신뢰는 훼손된다. 신용의 기준을 흔드는 순간, 사회 전체가 무너진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높은 점수’가 아니라 ‘의미 있는 점수’다. 숫자 놀음의 끝은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를 갉아먹을 것이다.
[3줄 요약]
신용 사면이 반복되면서 국민 절반이 ‘900점 클럽’
성실 채무자는 박탈감을, 금융은 신뢰 붕괴를 맞고 있음
숫자 지우개가 아니라, 위기 전 막아주는 안전망이 진짜 해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