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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에 감춰진 작가의 창작 노트 해독 프로젝트

린드그렌 코드(Astrid Lindgren-koden)

by 프렌치 북스토어

8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100개 이상의 나라에서 수억 부가 팔린 스웨덴 소설. 주근깨에 빨간 머리를 한 우리에게는 《말괄량이 소녀 삐삐》라고 번역된 《삐삐 롱스타킹(Pippi Longstocking)》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의 작법은 독특하기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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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들의 시작은 건강 때문에 학교를 쉬게 된 그녀의 딸 카린(Karin)이 자신의 건강이 다시 좋아지길 바라는 기원하는 이야기를 써 달라는 부탁으로 시작하게 된다. 카린은 린드그렌에게 "삐삐"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고, 린드그렌는 펜 대신 속기용 연필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과거에 익혔던 멜린 속기(Melin shorthand)를 이용해 이야기의 뼈대를 단숨에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 속기 원고는 이후 타이핑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원고가 되었고, 1945년 《삐삐 롱스타킹》, 스웨덴어로 Pippi Långstrump은 정식 출간되었다.




Lindgren_1960.jpg?w=1100&q=80&fm=jpg&fl=progressive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이후 린드그렌은 자신이 근무하던 출판사 래벤 & 셰그렌(Rabén & Sjögren)에서 편집자 겸 작가로 활동하며, 속기(stenografi)로 초안을 쓰고 직접 타이핑한 원고를 곧바로 인쇄소에 보내는 독특한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편집자들도 린드그렌의 책을 책상에서가 아니라 박스에서 막 출고된 인쇄본으로 처음 마주하곤 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이야기의 첫 독자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타이핑된 최종본은 린드그렌의 망설임이나 고뇌, 수정된 문장들은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정제된 완성본은 결과일 뿐, 그 과정은 모두 속기 노트 속에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46c5a8ab-a790-4696-a32d-5cfbac5a4dcb-768x519.jpg 린드그렌의 속기 노트




그녀가 작성한 속기 노트는 총 670권에 이른다. 현재 스웨덴 국립도서관과 스웨덴 아동도서연구소에 보관 중인 그녀의 노트에는 그녀가 처음 이야기의 형체를 만들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간 모든 순간이 켜켜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속기 노트는 린드그렌의 창작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1차 자료로 여겨지고 있었다.




34d08623a820e01fcb14b3f95f0f233d6f6e0cff.jpg 멜린 속기(Melin shorthand) 시스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멜린 속기(Melin shorthand) 시스템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했다. 속기로 원고를 작성하는 것은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글쓰기보다 훨씬 속도가 빨라 작가의 생각 흐름을 놓치지 않고 받아쓰기에 유리했고,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고유 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노출될 위험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속기 사용은 단순한 개인적 선호를 넘어, 그녀가 라벤 & 셰그렌 출판사에서 경력을 시작하기 전 약 15년간 비서로 일하면서 몸으로 익힌 전문적인 습관이기도 했다. 그녀는 초기 구상뿐만 아니라 원고 편집에도 속기를 활용했다. 편집된 속기 노트를 직접 타이핑하여 인쇄소로 보내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러한 독특한 작업 방식은 그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Astrid_Lindgren_Dalagatan.jpg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수십 년 동안 린드그렌의 속기 원고는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해독 불가 작업물은 그녀의 창작 과정에 대한 신비감을 더했다. 해독이 불가능한 미지의 자료라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에 거의 탐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부터 스웨덴에서는 린드그렌 코드(Astrid Lindgren-koden)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수십 년간 읽을 수 없는 암호처럼 여겨지던 린드그렌의 속기 노트를 해독하기 위해서였다. 이 프로젝트는 린드그렌 창작의 첫걸음에서부터 최종 완성까지 모든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문헌학자, 컴퓨터과학자, 도서관사, 그리고 속기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인력들이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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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반 손글씨 인식(HTR) 기술을 활용한 이 프로젝트는 린드그렌의 속기 원고를 디지털 이미지로 스캔하고 기계학습(딥러닝) 모델을 이용해 글자를 자동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다음으로 은퇴한 속기사를 포함한 숙련자 170여 명이 실제 속기 노트를 읽고 전사하는 방식으로 인식률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속기사와 린드그렌 전문가가 모여 원고를 공동 해독하는 여섯 차례 해커톤을 열어 난해한 구절을 토론하고 가이드라인을 구축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해독된 원고를 바탕으로 린드그렌의 수정 과정을 Genetic Criticism 관점에서 분석을 이어나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린드그렌의 속기 노트들은 '읽을 수 없다'는 통념을 완전히 깨트렸다. 특히 1973년 소설 《브뢰더나 리옌회르타》(형제 라이온하트)의 원고 52권에 달하는 초안이 불과 5주 만에 완전 전사되는 성과를 냈다.



참고: Genetic Criticism이란?

Genetic criticism은 문학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창작 과정을 연구하는 비평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의 결과물인 텍스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하는데, 작가의 초고, 메모, 수정 흔적, 문서의 배치 방식 등에서 창작의 흐름을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이후 등장한 이 비평은, 구조적 해석 중심의 전통적 문예 비평에서 벗어나 생산의 역동성, 즉 글쓰기의 과정성(process)을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다.

Genetic criticism은 단순히 문학 연구에 국한되지 않고, 인지과학, 언어학, 역사학, 컴퓨터과학 등과 학제적으로 연결되어 다양한 분야의 원고 분석에 응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초고에 덧붙인 수많은 메모들, 발레리의 시 초안에서 볼 수 있는 언어와 그림 사이의 왕복 운동은 작가의 사유와 감정이 어떻게 텍스트로 결정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디지털 시대의 Genetic criticism은 컴퓨터 파일의 수정 이력, 삭제 흔적, 메타데이터 등을 분석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창작 과정을 추적한다. 창작은 더 이상 종이 위의 흔적만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도 기억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전비평은 현대 글쓰기의 변화 속에서도 유효한 해석 도구로 자리하고 있다.




819GfPGyKhL._AC_UF1000,1000_QL80_.jpg 《사자왕 형제의 모험(bröderna lejonhjärta)》



노트 해독을 통해 린드그렌 문학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속속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bröderna lejonhjärta)》 초안에서 주인공 사자왕 요나탄은 처음에 검은 머리였지만, 최종본에서는 금발 소년으로 바뀌었다. 수십 번의 수정 끝에 결말도 여러 버전이 담겨 있었고, 요나탄의 영웅적인 희생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원래 기획을 크게 바꾼 사실도 확인되었다.


《소년 탐정 칼레(Mästerdetektiven Blomkvist)》의 주인공 칼레 블롬크비스트(Kalle Blomkvist)의 이름도 칼레 칼손(Kalle Karlsson)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린드그렌은 칼손이라는 성을 이후 작품인 《지붕 위의 칼손(Lillebror och Karlsson Pa Taket)》의 프로펠러를 타고 등장하는 주인공 칼손을 위해 남겨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삽입된 문장들이나 지운 부분들을 통해 린드그렌이 끊임없이 문장을 다듬고 완급을 조절한 과정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린드그렌은 자신의 글을 완성된 오디오북처럼 소리 나는 문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부분이다. 해독 노트 중 한 대목에서는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으로 수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수정 전: 내 동생 이야기를 해야겠어. 내 동생 조나단 라이언하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래, 거의 사가 같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들은 유령 이야기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전부 사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야.


수정 후: 내 동생 이야기를 해야겠어. 그래, 말하고 싶어. 그래, 거의 영웅 전설 같을 거야. 그리고 조금은 유령 이야기 같기도 해. 하지만 나 말고는,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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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드그렌의 손글씨에는 작가로서의 고뇌와 예술적 직관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앞서 언급한 수정 행위만 보더라도, 그녀가 문장을 더욱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3186c317-3cca-444e-b26e-f20a3c6f51e5?h=708&tight=false&w=1372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와 그녀의 속기 노트




린드그렌 코드 프로젝트는 디지털 인문학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수백 권에 이르는 핸드라이팅 원고가 디지털화되어 원문 텍스트로 복원함으로써, 전에 없던 방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연구 팀은 앞으로 독자들을 위한 디지털 전시회 개최까지 구상 중이다. 린드그렌의 소중한 수고가 새로운 세대와 만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익숙한 이야기 속에 숨은 린드그렌을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해독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속기 코드가 해체되었고, 그 안의 아이디어와 수정의 흔적은 린드그렌이 고민하며 글을 써 내려간 시간의 기록들이 되살아 나게 되었다. 디지털 인문학의 본격적인 시작점에서 탄생한 린드그렌 코드 프로젝트 덕분에, 린드그렌의 다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재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남긴 비밀 노트는 이제 모두에게 열린 책이 되었다. 오래된 암호가 풀리는 순간, 린드그렌과 그의 이야기에 새로운 빛이 내리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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