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L. 메이와 《빨간코 순록, 루돌프》의 탄생 이야기
빨간 코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
빨간 코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크리스마스 캐릭터 중 하나인 빨간 코의 루돌프. 그 시작은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1939년 미국의 한 백화점 판촉물로 처음 탄생한 이 작은 순록 이야기는, 창작자인 로버트 L. 메이(Robert L. May)의 개인적 역경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 작은 이야기가 점차 크리스마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30년대 후반 미국의 경제·문화적 맥락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로버트의 삶과 창작에서부터 이야기의 초기 출판 과정과 도전까지 루돌프 이야기가 어떻게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1930년대 말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오랜 경제 침체 끝에 소비 심리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은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벽 배경에서 기업들은 고객의 지갑을 열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은 한 해 중 가장 큰 대목이었고, 백화점들은 창의적인 판촉 전략으로 손님들의 발길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무료 어린이 동화책 증정과 같은 이벤트였습니다. 시카고에 본사를 둔 대형 백화점 체인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어린이들에게 색칠공부 책자를 무료로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1939년에는 자체적으로 새로운 동화책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습니다. 이 결정을 내린 몽고메리 워드 경영진은 새로운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창작할 임무를 회사 내 광고부 직원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무명 카피라이터에게 역사적인 과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 특별한 임무를 받은 이는 다름 아닌 로버트 루이스 메이(Robert L. May)였습니다. 1905년 태어나 명문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한 메이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작가를 꿈꿨지만, 1930년대 후반의 현실은 시인이 아닌 백화점 카피라이터였습니다.
시카고 몽고메리 워드 본사에서 상품 카탈로그와 광고 글을 쓰는 그의 일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30대 중반의 메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35세가 다 되도록 빚에 허덕이며 여전히 상품 카탈로그 원고를 쓰고 있었다. 한때는 '위대한 미국 소설'을 쓰리라 꿈꾸었건만, 현실의 나는 남성용 셔츠에 대한 광고문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라고 당시 자신의 심정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버트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병원비 때문에 가세는 이미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그 역시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빚더미에 앉은 채 병든 아내를 돌보면서도 직장에서 광고 문구를 써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한 유쾌한 동화를 쓰는 일은 그에게는 큰 심리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버트는 1939년 1월 추운 날 출근길에 "거리마다 걸린 연말 장식이 철거된 것을 보고 오히려 안도했다. 아내의 오랜 병환으로 전혀 축제 기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그는 슬픔과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개인적 상황은 훗날 루돌프 이야기의 정서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외톨이 순록의 슬픔을 묘사하는 대목들을 써 내려가며, 어쩌면 스스로의 외로움과 당면한 현실을 투영했는지도 모릅니다.
로버트는 몽고메리 워드로부터 어린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동화를 쓰라는 임무를 부여받자, 어떤 이야기가 좋을지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즉흥적이고 익살스러운 시를 잘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이 장기를 살려 동화를 시 형식으로 써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주인공으로 어떤 동물을 등장시킬지 고민했는데, 마침 당시 인기 있던 어린이 이야기 '꽃을 좋아한 황소 페르디난도(The Story of Ferdinand)'처럼 동물 주인공이 아이들에게 친숙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순록은 이미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에 친숙한 캐릭터였기에 로버트는 자연스럽게 순록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1823년 시 《성 니콜라우스를 만난 전날 밤(A Visit from St. Nicholas)》에서 8마리 순록이 처음 언급된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버트는 이야기의 주제를 자신이 평소 공감해 온 '따돌림받던 존재가 결국 인정받는다'는 흐름으로 정하고는 어렸을 적부터 내성적이고 작았던 자신이 언젠가 성공을 통해 인정받길 바랐던 마음, 그리고 누구나 잘 아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 깊이 감명을 받았던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산타클로스의 무리에 끼지 못하는 외톨이 순록 한 마리를 주인공으로 동화를 만들어가는 도중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순록에게 특별한 개성을 부여하는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로버트는 어느 겨울날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보라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시카고의 뿌연 풍경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만약 산타가 이렇게 안개 낀 밤에 길을 잃을 처지라면, 밝게 빛나는 코를 가진 순록이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로버트는 이 순록이 남들과 다른 밝게 빛나는 코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정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주인공의 이름을 짓는 일도 신중했습니다. 로버트는 기억하기 쉽고 운율감 있는 이름을 찾고자 알파벳 R로 시작되는 후보들을 여러 개 떠올렸습니다. 그의 메모지에는 롤로(Rollo), 레지(Reggy), 로드니(Rodney), 롤랜드(Roland), 로더릭(Roderick) 같은 여러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후보군에 올랐던 이름들은 너무 명랑하다든지 지나치게 점잖다는 이유로 제외되었습니다. 결국 루돌프(Rudolph)로 결정했는데, 그는 이후에 발음하기도 좋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와 주인공이 결정되자, 메이는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옛날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로 시작되는 전래 시 성 니콜라우스를 만난 전날 밤(A Visit from St. Nicholas)처럼 운율을 맞춘 이야기 시(poem) 형태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원고의 첫 부분은 "Twas the day before Christmas, and all through the hills, the reindeer were playing…(크리스마스 전날, 언덕 위에서는 순록들이 뛰놀고 있었죠…)”와 같은 경쾌한 운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는 문학적인 완성도보다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주인공 순록은 새빨간 코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받지만 결국 그 특별한 코 덕분에 안개 낀 밤에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이끄는 영웅이 된다는 감동적인 결말로 구상이 짜여졌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은 있었습니다. 처음에 로버트가 빨간 코 순록 아이디어를 상사에게 보고했을 때, 부장은 '그게 최선인가? 더 나은 건 없나?'라며 미심쩍어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빨간 코는 흔히 술 취한 사람을 연상시키는 속된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빨간 코를 가진 순록은 고객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피드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사내 시범 청중을 대상으로 한 비공식 반응 조사에서도 몇몇은 루돌프의 빨간 코 설정에 대해 알코올 중독자 같다는 평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버트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사 미술부에 있던 친구 덴버 길렌(Denver Gillen)에게 루돌프 캐릭터의 스케치를 몇 장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길렌이 그려낸 어린 순록 루돌프의 귀엽고 선량한 모습, 그리고 빨간 코가 순수하게 빛나는 삽화를 본 상사는 결국 마음을 바꿔 로버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루돌프 이야기는 최종 집필에 녹색 불이 켜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로버트 자신의 인생에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1939년 여름, 이야기를 집필하는 도중에 사랑하는 아내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아내를 잃고 어린 딸을 홀로 키워야 하는 처지가 된 로버트에게 회사 상사는 당연히 그의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이 마무리하도록 할 수 있도록 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 완성하겠다며 그의 의지를 고집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떠올리며 "나에겐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루돌프가 필요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창작에 몰두하는 일이 슬픔을 이겨낼 정신적 탈출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가정을 추스르면서도, 로버트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다듬었고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완성된 이야기를 딸 바바라와 장인·장모 앞에서 처음으로 낭독했을 때, 모두의 눈빛에서 자신이 의도했던 감동이 전해지는 것을 보고 메이는 비로소 작품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1939년 연말, 마침내 《빨간 코 순록 루돌프(Rudolph the Red-Nosed Reindeer)》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가 인쇄되어 전국의 몽고메리 워드 매장에 배포되었습니다. 회사는 이 32페이지 분량의 귀여운 동화책을 고객용 무료 증정품으로 대대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산타클로스와 아홉 번째 순록 루돌프의 이야기책은 예상 이상으로 큰 히트를 쳤습니다. 몽고메리 워드는 첫 해에 무려 240만 부에 달하는 책자를 인쇄하여 전국 지점에서 나누어 주었고, 준비한 물량이 동이 날 정도로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인세는 없었지만 무료 증정용 동화책은 그 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화제의 책이 된 것은 분명했습니다. 실제로 몽고메리 워드 본사에서 각 지점장들에게 배포한 홍보 포스터에는 이 책자를 가리켜 '그 어느 때보다 신나는 크리스마스 증정품, 여러분의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 대히트작!'이라고 광고했을 정도였습니다. 루돌프는 단숨에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를 도운 영웅적 순록의 이미지는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루돌프의 감동 스토리를 미국 전역의 가정에 전파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로 배포된 맞춤 제작 동화책은 전례 없는 마케팅 성공 사례였습니다. 이야기의 성공과는 달리 로버트의 생활고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몽고메리 워드의 직원으로 급여를 받고 있었고, 아내의 병원비로 인한 빚도 갚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종이와 인쇄물에 대한 제약이 생기면서, 루돌프 책자는 1939년 이후로 몇 년간 추가로 인쇄되거나 배포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루돌프 이야기는 가족들 사이에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서서히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1940년대 중반이 되자 이를 책으로 다시 출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작은 출판사인 맥스턴(Maxton) 출판사는 이 이야기를 정식 하드커버 동화책으로 출간하여 시중에 판매했고, 이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로버트에게는 뜻밖의 행운도 찾아왔습니다. 몽고메리 워드의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슈월 에이버리(Sewell Avery)는 1946년, 별다른 조건 없이 루돌프에 대한 권리를 로버트에게 양도해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받은 프로젝트로 창작된 캐릭터 저작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아마 아내를 여읜 로버트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이자, 전쟁 이후 더 이상 백화점 측에서 이 캐릭터를 활용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로써 로버트는 자신의 순록 캐릭터를 독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와 소유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버트가 루돌프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받게 된 이후, 이 감동적인 순록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메이에게는 조니 막스(Johnny Marks)라는 이름의 처남이 있었는데, 그는 직업 작곡가로서 당시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로버트는 자신이 쓴 이야기 루돌프를 노랫말로 각색하면 훌륭한 크리스마스 음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막스에게 이를 제안하게 됩니다.
조니 막스는 이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경쾌한 멜로디의 〈루돌프 사슴코(Rudolph, the Red-Nosed Reindeer)〉라는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1949년 가을, 미국의 인기 가수였던 노래하는 카우보이 진 오트리(Gene Autry)가 이 노래를 음반으로 발표하자, 루돌프 노래는 1949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미국 음반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발매 첫 해 수백만 장의 싱글 음반이 팔려나갔고, 결국 이 곡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로 등극했습니다. 이 루돌프 노래는 이후 여러 가수들에 의해 500여 종 이상 재녹음되었고, 오랜 기간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 다음가는 베스트셀러 앨범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노래를 통해 루돌프의 사연이 노래 가사와 멜로디에 실려 북미 전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로버트의 딸은 노래가 없었다면 루돌프 이야기가 이 정도로 폭넓은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노래의 성공에 힘입어 루돌프는 명실상부한 크리스마스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루돌프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영화와 만화책, 각종 장난감들이 등장하며 캐릭터 사업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1964년에는 미국 TV에서 루돌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특집 인형극 『빨간 코 순록, 루돌프』가 방영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이후 매년 연말이 되면 재방송되는 고전 명작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오래 사랑받는 크리스마스 TV 특별편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버트는 루돌프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50년대에 몽고메리 워드를 퇴사하고 루돌프 관련 사업과 저작권 관리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빚에 시달리던 그였지만, 루돌프 캐릭터와 노래로 인한 수익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이룰 수 있었고 로버트는 평생 자신이 만들어낸 이 빨간 코 순록 이야기에 큰 자부심을 가졌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세상에 전한 그 별난 순록 덕분에 많은 이들이 기쁨을 얻었다'라고 즐겨 이야기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