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개발자의진로 고민
"I send you a Big virtual hug!" (원격으로라도 크게 안아줄게!)
그런 릴리와 나의 경로가 오늘 릴리의 중대 발표를 기점으로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머뭇거리며 고백했던 것이 2018년 겨울쯤일 테니 꿈이 실현되기까지 약 2년 반의 시간을 릴리는 방황하고 속 끓이며 보냈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릴리는 이제 개발 일이 싫어진 걸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다만 궁금해진다고. 싫어서가 아니라 저쪽 너머의 일이 갈수록 흥미가 가는 것이라고. 이런 관심사를 매니저에게 표현했을 때 딱히 반기지는 않았으나 이후로 조금씩 관리 업무를 위임받아 경험을 쌓는 중이라 했다. 그 확신과 행동력. 여러분 이런 사람이 제 친구라고요!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을 정도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자랑하는 마음에 가깝겠지요)
이곳 테크 회사에서는 개발자와 관리자의 직무와 진로를 구분해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개발자는 실무 담당자로 제품과 서비스를 구현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반면 관리자는 프로젝트의 진행이 원활할 수 있도록 중간 소통 중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행정적인 업무를 전담하고 인력 관리에 관한 모든 일을 맡는다. 전문 분야를 세분화해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시스템이랄까. 개인이 진급을 거듭하다 관리직으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진급할 수 있도록 나뉘어 있다. 프로젝트의 성공과 담당한 개발자들의 성장이 관리자의 성과 척도가 되기 때문에 관리자는 좀 더 확실한 지원사격과 교통정리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나는 이 선명한 직무의 경계 덕에 오히려 진로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나마 소질을 보이고 좋아하는 개발 일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높은 책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받았다. 만약 내가 잘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관리의 책임을 맡게 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물론이고 내게 보고하는 모든 사람들이 불행할 일이다. 이런 생각이 강하다 보니 내게 없는 자질에 끌리고 기꺼이 그 길을 가는 릴리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다행히 우리 회사에서의 보직 이동은 훨씬 쉬운 편이기도 하고 선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남들이 쉽다고 쉽게 말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쉽고 보장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개발자 인력을 하나 잃게 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의 매니저는 딱 아쉬울 정도로만 마지못해 릴리를 도왔다. 사람들을 두 번 세 번씩 설득하고 직접 발로 뛰어 기회를 찾는 일은 모두 그녀 홀로 감내해야 했다. 2년 간 눈앞에 다가온 기회가 조직 개편으로 무산되기도 하고, 3개월 뒤에 팀을 꾸려줄 수 있다던 임원이 돌연 회사를 나가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일만 계속되었다. 나는 릴리의 하소연을 듣는 일 외에 도울 방법이 없어 마음이 아팠다. 너 참 대단하다, 응원한다 하는 상투적인 말만 건넬 뿐. (물론 상사 욕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릴리는 지난주부터 전적으로 관리업무만 맡아하고 있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프로젝트의 진행을 돕고 과정의 개선방향을 고민하는 것, 사람들을 설득해 의견을 한데 모으는 일이 즐겁단다. (정말 신기해) 아직 자기에게 보고하게 될 개발자 3명과 개인 면담시간을 가지진 못했고 다음 주로 예정되어 긴장된다는 말에 설렘이 묻어난다. 들뜬 새내기 매니저의 시작을 목도하면서 해 준 것 없이 뿌듯하기도 했다가 슬쩍 부럽기도 했다.
"Thank you so much for listening to my wining and frustration all these times. I'm so grateful that you and I have built up this special bond and sisterhood."
(지금껏 내가 징징대고 힘들단 얘기 하는 거 들어줘서 고마워. 너랑 이렇게 긴 시간 연대하고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하고 싶던 말이야. 릴리, my work sister. 항상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