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데모데이 행사를 목전에 두고 발표를 준비할 때였고, 유난히 열을 올리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만듦새를 다듬었다. 이번에 발표하게 될 내 아이디어는 온전히 내가 제안하고 발전시킨 사안이라 애착이 컸고, 기존의 주먹구구 지루한 데이터 분석 방식을 벗어나 새롭게 내가 만든 툴을 써보는 건 어때요? 하며 동료 개발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큰 목적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약 10분 남짓. 짧은 시간 안에 직관적으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강한 인상을 남기려면 시선을 끌 수 있는 완성도 높은 UI(인터페이스)는 필수라 생각했다. 채 하루를 남겨놓고도 계속해서 배치를 바꾸고, 색을 달리해보면서 '아니 나 지금 정말 열정적이고 멋지잖아?' 하는 도취에 빠져있었다.
가장 친한 팀 동료에게 피드백을 부탁했다. 속내는 자랑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Wow, this looks great! but what's this chart for?"
오, 진짜 멋진데! 그런데 여기 이 차트는 뭐야?
"Oh that one? The red dots represent negative sentiments and the green ones, positive."
아 그거? 빨간 점들은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고 초록색 점들은 긍정적인 사인, 감정을 뜻하는 거야.
"Oh...... I see. I'm actually red-green color blind. Can't tell them apart. Perhaps... these ones look darker, so..."
아...... 그렇구나. 나 사실은 적록색맹이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네. 흠... 여기 이 점들은 좀 더 어두운가. 그러면 이게...
"나 사실은 적록색맹이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네."
뎅 - 머리 위에서 징이 울렸다. 너무 몰두해서 머리를 썼더니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데 좀 걸렸던 것 같다. 어이고, 이 멍청아. 멍청아. 멍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애써 누르면서 "으앗! 미안, 미안. 그 생각을 정말 미처 못했어. 지금 당장 바꿀게." 허둥대며 얘기했다.
적록색맹. Red-Green Color Blindness. 영어단어도 워낙 직관적이라머릿속으로 한국어 뜻도 단숨에 떠올랐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단어의 뜻을 아는 것과 내가 2년이 넘는 시간 알고 친한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지는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적록색맹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와 비슷한 일을 왕왕 겪게 될까. 눈을 가늘게 뜨고 명도의 차이라도 알아채려는 노력을 해준 그 동료를 보며 즉각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의 회로를 돌릴 수 없다는 점이, 내 무지가 부끄러웠다.
"적록색맹이면 지금 이게 어떻게 보이는 거야? 내가 잘 몰라서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하고 물었다. 그와 내가 친하기 때문에 편하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도 있었고친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고 싶었다. 동료의 경우에는 경험으로 보아 빨간색과 초록색의 계열인 건 짐작이 되긴 하지만 무채색에 가까운 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도 명도의 차이가 있는 경우엔 서로 다른 색이라는 걸 구분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적록색맹의 시각 예시. 출처: https://enchroma.com/pages/types-of-color-blindness
개선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처럼 점 그래프의 경우 각기 다른 그룹의 점들을 색으로 구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점의 도형도 바꿔주는 것이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 (예: ○ ● ◆ □) 선 그래프였다면 그냥 선이나 점선 등으로 차별을 둘 수도 있고 선 굵기를 다르게 설정하는 방법도 있다. 웬만한 그래프 시각화 툴이라면 간단한 변수만 바꾸어 위의 설정을 즉시 적용할 수 있다.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냐고? 당시에는 보기 좋게 꾸미고 싶은 욕심이 눈을 가렸다. 다양한 점의 표현방법들이 내 툴의 가독성을 높인다는 (나만 몰랐던 것 같은 자명한)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예뻐 보일 따름이다.
이미 알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더 창피한 것) 회사에서 세상에 내어놓는 소프트웨어 중 사용자가 대면하는 UI (User Interface), 그러니까 보이는 모든 대상의 디자인은 출시 전에 UI/UX/접근성(Accessibility) 검토를 거치도록 제도화되어있다. 여기서 UX(User Experience의 준말)란 단순히 보이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고객의 전반적인 소프트웨어 사용 경험을 통틀어 칭한다. 접근성은 누구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가능한 동등한 접근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바로 이 것이 여기서 내가 크게 간과한 부분이다. 문제가 되는 지점 및 그에 합당한 개선 방법들 모두 가이드라인에 상세히 나와 있다. 접근성 팀의 역할은 비단 제품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도장만 찍어주는 문지기에 그치지 않는다.사내 다양한 발표와 이벤트를 통해 접근성에 대해 알리고 제품 개발 초기 단계의 디자인 과정에도 참가한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들 찾아내는 데에 접근성 팀원들의 부지런한 노동력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달리 기술회사겠는가? 개발자의 코드 자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들은 자동화된 기계 테스트들이 짚어내고 대안 또한 추천한다.
접근성에 관련한 자료는 이미 다양하게 많으니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겠으나 실제 내가 목도한 몇 가지 사례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진과 이미지, 로고 등의 시각적인 정보에만 의존하는 자료에 대체 문구를 달아주는 것. 쉬이 간과되는 사항이지만 이런 경우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조기발견이 쉽다.
이건 어떤가? 한 번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디자이너가 근사한 배너를 그려 내부에 멋진 문구를 '그려'넣은 적이 있다. 비단 스크린 리더기를 사용해서 정보를 습득하는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이 멋진 문구를 읽지 못하게 될까?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다면, 굳이 장애만이 이 정보에의 접근을 방해하는 요소일까? 단순히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어떨까?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너무나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해 번역기 써서 진땀 빼며 결제까지 해냈는데, 정작 중요한 주의사항은 이미지 안에 포함된 글씨에 쓰여있었다면?
접근성. 누구나 제품을 사용함에 있어 동등한 접근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 이번처럼 내 멋대로 디자인을 만지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데모할 툴이 회사 내부 사용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핑계가 될 순 없겠지만) 발표 전 동료에게 먼저 보여주지 않았다면 내 선의로 가득 담긴 예쁜 그래프들의 문제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롯이 나 같은 불완전한 개인이 의식을 가지고 해결하길 맡겨두는 것이아니라 동료들의 검토와 접근성을 전담하는 팀의 전문성, 자동화 발견 시스템이 있어 든든하다. 나날이 속도전을 하는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잠시 숨을 고를 여유는 필요하다.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저마다의 노력을 더하면 충분히 기술에도 온기를 담을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