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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대신 고통을

한국순교자 대축일

지난 8월 초 뜨거운 태양 아래 세명의 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산길을 걷고 있었다. 굳이 작열하는 태양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뜻은 어딘가 닿아 있었다.


'한티가는 길', 대학생 35명과 함께 2박 3일동안 45.6킬로미터를 걷기 위해 먼저 동행 사제들이 그 길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각자 한티순교자메달이 하나씩 주어졌었는데 그 메달은 한티성지에 흩어져 있는 37기 순교가 묘역의 고유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27번 순교자를 만나러 걷고 있었다. 더위와 땀, 끊임없이 날아드는 초파리로 인해 탈진에 가까이 이르르자 '왜 이런 길을 나섰을까?' '내가 겪는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첫날밤 동료 사제들과의 짧은 나누기로 우리가 걷는 길은 천주교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무명순교자들을 만나러 가는 이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안락을 원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과연 안락만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인가, 안락 대신 고통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을까?


영국 작가 앨런 왓츠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완벽히 생생하게 꿈꿀 수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사람들은 당연히 온갖 쾌락을 선택하고 모든 소원을 이룰 것이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 밤에도. 하지만 곧, 온갖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뜻밖의 경험을 해보고 싶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을 꿈꾸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게 위험, 불확실성, 박탈을 추가하여 도박을 할 것이며, 실패도 하겠지만 성공의 짜릿함도 맛보게 될 것이다. 덕분에 더 큰 난관에 일부러 직면하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완벽한 꿈꾸기 대신 지금 당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을 살아갈 선택을 할 것이다."


마침내...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인해 확 와닿는 이 말처럼, 마침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말한다.


"인간은 안락한 삶을 선호한다고 하지만 존은 대꾸한다. "하지만 저는 안락함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시를, 진정한 위험을, 자유를, 선을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이보다 인간 본성을 잘 요약한 말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락, 안전, 짧은 노동, 위생을 원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때론 고난과 자기희생도 원한다. 세계가 혼돈에 흔들리던 20세기 초에 독일의 히틀러는 희망이 없는 독일 국민들에게 안락과 안전, 좋은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고난과 위험, 그리고 죽음을 제공하겠다'고 공언했고, 그 결과 나라 전체가 그의 발밑에 엎드렸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분께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 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초연함을 지켜야 한다.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으로 더 가까이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보다 건강, 빈곤보다 부귀, 업신여김보다 명예, 단명보다 장수를 원할 때 그것마저도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놓아버리는 자유와 초연함을 이냐시오 성인은 가르치고 있다.


시련과 희생은 사람을 깊게 만든다. 인생은 삶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인간 개개인에게 주는 시련과 고통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자 축적이다.




다시 한티가는 길과 무명순교자들을 생각한다. 더불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가져오는 시련을 희생으로 기꺼이 맞이했다. 그들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차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3).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 용광로 속의 금처럼 시험을 받고 번제물처럼 바쳐진 그들은 '하느님께 맞갖은 이들임'을 드러내 보였다.


마침내, 새로운 길을 바라보며 나도 걷는다. 그 길에서 안락 대신 고통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으며 그들이 먼저 간 삶은 우리의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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