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습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다른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고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을 들어본 뒤) 대부분 사람은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깨끗한 얼굴을 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씻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상대방이 잘못하는데에는 나의 책임도 있고, 내가 깨끗할 수 있는 것도 상대방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습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깨끗한 채로 내려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대답을 들어본 뒤) 똑같은 질문이죠? 그래서 답도 똑같이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말하실텐데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습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한데 다른 아이의 얼굴만 더러운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툼과 분열이 있을 때 한 사람만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사이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문제가 있을 때 한 사람만 잘못한 경우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묻는 율법 교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항상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내 말을 들어라'하고 말하는 사람은 율법 학자처럼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그럴듯한 질문을 합니다.
예전에 대구대교구 사제 연수 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에 포섭되어 활동하다가 극적으로 탈퇴한 젊은이의 체험담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목표로 한 사람을 세뇌시켜 이단에 빠지게 하고 가족마저 버리고 거짓 신념으로 교주를 맹신하게 만드는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발표자가 이야기를 마치고 청중인 사제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 어떤 사제가 '신천지를 탈퇴한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립지 않나요?'하고 물었습니다. 반인륜 집단인 이단 신천지에서 벗어나 그 고통에 대해 특강을 한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질문이었습니다. 대답을 주저하는 발표자에게 그 사제는 '이상한 집단이지만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고 빠져들지 않았나요? 종종 지금도 그때가 그립지 않나요?'
마치 죄인을 추궁하듯이 질문을 쏟아내는 사제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발표자, 마침내 '그랬던 것 같다.'며 인정한 발표자에게 '그럴 줄 알았습니다.'하고 혼자 말을 하며 마이크를 내려놓는 사제에게 저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상식마저 저버린 그의 집요함과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동료로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제는 자기가 옳음을 드러내고 싶어서 한 사람의 상처난 마음을 후벼파고 그 폐허 위에 승리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충조평판, 즉 충고 조언 평가 판단에 능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 학자는 실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남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율법을 머리로만 알지 가슴으로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처럼 율법에 갇혀 타인을 위해 그것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말은 그만하고, 가서 너도 이웃이 되어 주어라.'
나를 넘어서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 이것이 이웃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배우자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가만 내 이야기부터 들어봐!'하고 강요하거나 상대의 잘못을 친절하게 일일이 지적하기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입니다. 나도 틀릴 수 있음을 알고, 때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어주는 것의 가장 높은 단계는 신영복 선생의 다음 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것을 항상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말없이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이웃은 없을 것입니다.
'말은 그만하고, 가서 너도 이웃이 되어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