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화는 정말 민주적 혁명일까?
AI와 짧은 대화를 통해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도 있지만, 저는 요즘 특정 주제의 흐름을 정리해 AI에게 글쓰기를 맡겨보곤 합니다. 보통 5~10개의 문장으로 프롬프트를 구성하고, 결론의 방향은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글이 완성되면 그제야 AI와 함께 더 깊은 토론을 이어갑니다. 오늘 소개할 글도 그런 방식으로 탄생했습니다.
1차적인 사고의 흐름이지만, 이 글을 계기로 각자의 2차, 3차 사고를 확장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몇 년간 탈중앙화(Decentralization)라는 단어만큼 세상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가 있을까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은행이 없는 금융 시스템(DeFi)을 만들고,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이 독점했던 개인 데이터의 통제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약속까지. 이 모든 것이 마치 낡은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민주적 혁명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봅시다. 이 '탈중앙화'의 물결이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 혁명일까요? 아니면, 기존의 국가와 은행을 대체하는, 코드와 알고리즘이라는 더 강력하고 비인간적인 '새로운 제국'의 시작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가능성에 대해 깊이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금융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따라붙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굳이 은행이 있어야 할까요?" 수백 년 동안 은행은 우리의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대출을 통해 자본을 유통시키며, 거래를 보증하는 '신뢰의 중개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이 '신뢰의 중개자'가 사실은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죠.
이러한 불신 위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탈중앙화 금융 혁신(DeFi)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중앙 서버나 은행 없이도 개인 간에 직접 돈을 빌려주고(대출), 이자를 받고(예금), 심지어 파생상품까지 거래할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의 매력은 명확합니다. 수수료가 저렴하고, 24시간 내내 작동하며, 누구의 허가도 필요 없죠. 마치 국경 없는, 규제 없는 금융 시장이 열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은행 창구가 닫힐까 걱정할 필요가 없고, 소액 대출을 받기 위해 까다로운 서류를 준비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이 은행 없는 금융 시스템은 양날의 검입니다. 규제가 없다는 것은 보호 장치도 없다는 뜻이죠. 해킹이나 프로토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여러분의 돈을 되찾아 줄 중앙 기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혁신은 맞지만, 이 분산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책임'이라는 무게는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은행이자, 보안관이자, 최종 보증인인 셈이죠. 어쩌면 은행이 사라진 자리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위험의 총량이 훨씬 커진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금융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디지털 삶의 기반인 개인 데이터 주권 확보 문제도 탈중앙화의 핵심 동력입니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거대 플랫폼에 우리의 모든 대화, 사진, 검색 기록이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 기업들은 우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천문학적인 광고 수익을 올리지만, 우리는 그 수익의 일부도 돌려받지 못하죠. 게다가 우리의 동의 없이 데이터가 유출되거나, 특정 게시물이 검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탈중앙 소셜 앱의 미래는 이러한 중앙 집중식 플랫폼의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데이터를 블록체인이나 분산 파일 시스템에 저장함으로써, 개인이 자신의 데이터 소유권을 되찾고, 데이터를 열람하거나 사용할 권한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금고에 넣고 열쇠를 자신이 가진 것과 같습니다. 이는 분명 매력적인 이상입니다. 우리가 '디지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디지털 시민'으로 거듭날 기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실적인 질문에 직면합니다. 나의 소중한 데이터를 영원히 나만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까요? 만약 제가 실수로 개인 키를 잃어버린다면, 그 데이터는 영원히 잠겨버립니다. 회복할 수 있는 '중앙'의 도움은 없죠. 또한, 이 앱들이 정말로 대규모 사용자들을 흡수할 만큼 편리하고 매끄러울지도 의문입니다. 편리함과 개인 데이터 주권 확보 사이에서, 대중은 결국 편리함을 선택해 온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탈중앙화의 물결 속에서, 현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플랫폼은 단연 이더리움입니다. 이더리움은 단순한 화폐를 넘어, 스마트 계약이라는 '코드'를 통해 금융 시스템뿐만 아니라 거버넌스(통치)까지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월드 컴퓨터'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까요? 이더리움 위에 대부분의 DeFi와 NFT, 그리고 수많은 DApp들이 구축되고 있습니다. 모든 활동의 기반이 되는 이더리움은 사실상 그 자체로 하나의 '중앙' 플랫폼처럼 기능합니다. 물론 '탈중앙화'되어 있지만, 전 세계 수많은 노드(참여자)들이 합의하고 사용하는 '단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이를 이더리움 중앙은행 논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과 핵심 개발자들이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전체 생태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대규모 해킹이나 버그가 발생했을 때 '하드 포크'라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강제로 되돌리는 행위는, 마치 국가 중앙은행이 금융 정책을 결정하는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지 않나요?
만약 이더리움 같은 거대 블록체인 플랫폼이 기존 국가의 영향력을 뛰어넘게 된다면, 우리는 코드 기반 통제 사회에 진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가는 법률과 제도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지만, 블록체인 시대에는 알고리즘이 곧 법이 됩니다. 스마트 계약에 쓰인 코드는 그 누구도, 심지어 코드를 만든 사람조차도 임의로 바꿀 수 없습니다.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대로 시스템은 냉정하게 움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통화 제국'의 탄생을 예고하는 그림자입니다. 이 제국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상황,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코드 기반 통제 사회에 명시된 규칙만이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이는 효율성과 투명성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극도로 비인간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여러분은 융통성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알고리즘에 의해 여러분의 자산과 삶의 규칙이 통제되는 세상에 살고 싶으신가요?
탈중앙화의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해 봅시다. 만약 모든 세금 징수, 재산권 등록, 투표 시스템, 심지어 국방 예산 집행까지 블록체인 기반의 알고리즘 사회 시스템으로 대체된다면, 국가의 필요성은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부패한 관료나 비효율적인 은행을 거칠 필요가 없으니, 국가와 은행은 사라지고 시스템 통제권이 코드를 소유하고 설계하는 '코드 개발자 계층'과 '대규모 자본 소유자 계층'에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알고리즘 사회 시스템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겠지만, 시스템의 '업데이트 권한'을 가진 소수에게 엄청난 권력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코드를 이해하고 접근할 수 없는 대다수의 일반 시민은 이 새로운 시스템에 그저 종속될 뿐입니다. 탈중앙화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중앙 집중화를 낳는 역설이죠.
가장 섬뜩한 미래는 인공일반지능(AGI)의 도래와 결합될 때 펼쳐집니다. AGI 시대 기본소득은 많은 미래학자들이 예견하는 시나리오입니다. AGI가 인간의 노동 대부분을 대체하게 되면,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정부는 사회 안정을 위해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일부 급진적인 미래주의자들은 AGI 시대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 논리는 현재의 민주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현행 민주주의는 '1인 1표'를 원칙으로 하지만, 만약 '국가 시스템에 기여하는 자만이 투표권을 갖는다'는 논리가 힘을 얻는다면, 대다수의 기본소득만 받는 사람은 선거권이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블록체인이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극단적인 사회 변화를 의미합니다. '국가 시스템'의 운영 주체가 블록체인 기반의 자동화된 거버넌스 시스템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생산성이 없는 계층의 정치적 권리는 손쉽게 박탈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 체제는 블록체인의 지분증명(PoS) 시스템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PoS 시스템은 '더 많은 암호화폐를 가진 사람'이 네트워크의 의사 결정(검증)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입니다. 즉, 자본의 크기가 곧 권력의 크기입니다.
이 논리를 사회 시스템에 적용해 봅시다. 만약 기존 사회 제도가 블록체인 기반 거버넌스로 대체되는 것이 현실화되고, 사회의 의사 결정이 PoS와 유사한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대규모 자산을 소유한 소수의 계층('디지털 귀족')이 영원히 시스템의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습니다. 지분증명(PoS) 봉건제라는 섬뜩한 단어가 이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합니다. 중세의 봉건제처럼, '토지(자산)'를 가진 영주가 농노(기본소득 수혜자)를 통제하는 구조가 디지털 세상에서 자산을 매개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탈중앙화가 약속했던 '모두에게 권력을'이라는 이상은 사라지고,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권력을'이라는 자본주의의 냉정한 원칙이 코드에 의해 영구적으로 새겨지는 암울한 미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금융, 데이터, 그리고 사회 시스템 전반에 걸친 대격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탈중앙화는 분명히 기존의 비효율적이고 부패하기 쉬운 중앙 집중식 권력을 해체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중앙화 금융 혁신은 더 낮은 비용으로, 개인 데이터 주권 확보는 더 안전하게 우리의 디지털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대의 이면에는 이더리움 중앙은행 논쟁처럼, 새로운 형태의 권력 집중과 통제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코드 기반 통제 사회는 효율적이지만, 비인간적이고 수정 불가능한 알고리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AGI 시대 기본소득 논의와 결합된 지분증명(PoS) 봉건제 시나리오는 우리가 소중히 지켜온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뒤흔들 수 있습니다.
탈중앙화는 그 자체로 선(善)도 악(惡)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강력한 기술이자 시스템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기술을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철학으로 통제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극도로 민주적인 유토피아가 될 수도, 아니면 코드로 굳어진 영구적인 신 봉건시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탈중앙화'라는 달콤한 구호 뒤에 숨겨진 새로운 권력 구조를 철저히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이후 ‘피터 틸의 이더리움 제국 설계’라는 퍼즐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