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늘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응석부리던 아이였는데... 참 애교가 많았던 어린 모습이었는데... 이쁘게 잘 컸네.
근 이십 년 만에 한국에 오신 외숙모가 어린 나를 추억하셨다. 나는 그러했다. 늘 오빠 뒤에 있었다. 뭐든 오빠를 따라 했었고 오빠와 함께했었다.
명절날 외삼촌 댁에 가는 걸 좋아했었다. 장녀의 아들, 딸이었던 오빠와 내겐 여덟 명의 이종사촌 동생들이 있었고 우리는 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놀았었다. 게임도 하고 우르르 맥플러리도 사 먹고 신났었다.
각자 공백기가 있었지만 만나면 좋은 사이였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결혼 이후 나는 명절에 외갓집을 가지 않음으로써 사촌동생들과 소원해졌다.
오빠는 결혼하고도 명절에 외갓집을 다니면서 여전히 동생들과 친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오빠 장례식 때 알았다. 낯섦. 나만의 오빠인 줄 알았는데 나 외에 동생들이 여섯 명이 더 있었다(두 명은 외국에 있었다). 또 하나의 낯섦. 동생들이 다 어른이었다. 맏이였던 엄마의 딸로서, 사촌동생들을 탄생 때부터 봐 왔던 터라 막연하게 나보다 엄청 어리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바로 밑의 동생 하고는 네 살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오빠 장례 2박 3일을 묵묵히 지켜 주었다.
장손 제외한 손자 손녀들, 외손자 외손녀들을 비롯하여 속한 가족들은 다 나오세요.
외할아버지 장례는 전통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발인 제사에서 나를 비롯한 손주들이 모였다.
가장 연장자는 앞으로 오세요.
나였다. 한 번도 김 씨 가문에 속하지 못했던 외손주였다. 이쁨은 받았으나 묘하게 가족이지 못했던 느낌, 차례에서도 당연히 제외됐던 딸의 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나란다. 이 년 전 외할머니 장례 때는 제사에 참석하지도 않았었다. 이번엔 얼떨결에 나가서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고 술잔을 돌리고 절을 했다.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추모의 마음은 같았다.
원래는 오빠였어야 했다. 또 한 번 오빠의 부재를 느꼈다. 오빠의 등이 참 넓고 단단했고 따뜻했음을 나는 참 자주 느낀다.
자기가 엄마 많이 신경 써 드려야겠다. 많이 편찮으셨다며. 삼촌이 자기 오빠 칭찬 참 많이 했었는데... 자기 오빠가 좋은 사람이었지. 자기는 엄마랑 가까이 살아?
엄마는 나랑 가까이 사시지 않는다. 처음엔 딸보다 손주들이라고 생각했다. 손주들을 보셔야 하셔서 지척에 계셔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살던 터전을 떠난 건 나였다. 엄마도 조카들도 원래 살던 곳에 살 뿐이었다.
나는 외숙모의 말씀을 들으며 또다시 울컥했다. 외숙모의 기억대로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던 응석받이였었다. 그런 내게 오빠와의 사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자 충격이었다. 그런데 다들 오빠의 죽음이 부모님께만 큰 슬픔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아니, 조카들까지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모두가 부모님과 조카들을 걱정하며 내게 그들을 부탁한다. 오빠의 죽음이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물론 감히 부모님의 슬픔에 비할 수 있겠냐만은 내게도 어마어마한 슬픔인 것인데 왜 아무도 몰라 줄까. 슬픔이 또다시 솟구쳤다.
언니는 재혼을 했다. 조카들에겐 새아빠가 있다. 부모님은 친손주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신다. 오히려 오빠의 빈자리를 나만 채우지 못하고 있다.
복받치는 감정에 말을 잘... 이어가질 못했다. 외숙모께서 오빠를 상기시켜서 미안하다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자손을 다 모아주셨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동생들과 근 이십 년 만에 뵙는 외숙모를 만나면서, 오 남매의 우애와 다툼을 보면서,가족의 당위적인 끈끈함을 느꼈다.
쓸쓸하고 슬펐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도 쓸쓸하셨을 것이다. 천수를 누리신 외할아버지의 죽음보다 현재 자기의 처지에 슬픔을 느끼는 가족이었다. 인간의 외로움은 너무도 근원적인 감정일 듯하다.
나도내 아이도 큰일에서 함께할 형제가 없다. 나는 괜찮다. 그런데 나의 장례를 치를 아이의 쓸쓸함을 생각하니 눈물이 치솟고 목이 메었다.
한없이 쓸쓸했던 장례였다. 손님이 많아 북적북적했음에도, 의외로 엄마와 외삼촌, 이모가 괜찮아 보였음에도, 나는 쓸쓸했다. 나를 보실 때마다 "쟈는 왜 이렇게 키가 크노. 아가 아 키운다."라며 껄껄 웃으시던 외할아버지를 더는 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