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KKH

꿈을 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너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너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 “나랑 결혼하면 좋겠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아 나도 사랑받을 수 있겠구나, 결혼을 꿈꿔도 좋겠구나 싶었다. 아빠라는 존재는 나에게 큰 짐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너란 사람이 가장 고마웠던 것은 나 역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게 해 준 것이었다. 가끔은 그런 상상만으로도 힘이 나곤 했으니깐. 사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아빠처럼 될까 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될까 봐,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까지의 과정이 가시밭길일까 봐. 나는 회피했고, 결혼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신포도 취급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먼저라고 말하지만, 나 역시 내 아이를 가지고 싶고, 내 아이는 나처럼 크지 않게 하고 싶었고, 내 미래의 부인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그런 소망을 다시금 일깨우게 해 준 너였기에, 나는 너를 더더욱 쉽게 떠나지 못했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너는 내게 행복한 꿈을 꿀 자격이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네가 힘들어했던 터라 더더욱 그 생각은 강박처럼 나를 좀먹었다. 아니 그땐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거겠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좀먹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처음에는, 너와의 이별 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너와의 이별에는 전혀 후회가 없다. 너무 늦은 이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뺀다면. 그러나, 지금 형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너와 만나며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꿈이었나 싶다. 형은 결혼을 위해 투쟁하고, 눈물 흘리고, 괴로워한다. 형의 부인될 사람의 가족은 형을 싫어한다. 그들은 형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형을 불러내 헤어지라고 하며 협박해 경찰이 온다. 형은 나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이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에겐 아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물려받을 유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형은 천대받고, 사투해야만 한다. 사랑을 위해 형은 불나방처럼 불속에 몸을 던지고, 뜨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래, 현실은 이런 거였지, 내가 무서워하고 도망치려 하던 현실을 마주하니, 네가 원래도 증오스럽지만 더욱 밉다. 3년간 나에게 헛된 꿈을 꾸게 한 네가 밉다. 아니 사실 너를 탓해야만 조금이나마 괜찮아질 내 머릿속이 더 밉다. 형보다 뛰어난 게 하나 없는 내가 마주할 사랑의 끝은 너무나 어두워 보이기에, 또 도망치고, 회피하다가 꿈을 꾸었던 나 자신을 원망하는 내 무의식이 밉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너 탓을 해야겠다. 너만 없었어도 나는 뜬구름 같은 꿈을 꾸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지금의 형의 모습을 보며 역시나 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지도 모르니깐.

앞으로의 발걸음이 너무나 두렵다. 나는 가시밭길임을 알면서도 그 길로 가야 하는가. 혹은 예전처럼 도망쳐야 하는가. 두려움이 나를 갉아먹는다. 회피하고 싶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하지만 아프기 싫다. 머릿속 마저 깜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