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다시 묻기 시작한 용기
교회를 떠난 것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예수를 다시 묻기 시작한 용기일 수 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대개 조용하다. 배교를 선언하지도 않고, 신을 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느 날부터 예배당에 발길이 닿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저곳에 내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속에는 분노보다 피로가, 확신보다 침묵이, 반항보다 체념이 담겨 있다. 특히 3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이들, 한때는 교회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직분도 맡았고 성경 공부와 봉사와 헌신을 당연하게 여겼던 이들일수록 교회를 떠나는 과정은 격렬하지 않다. 그만큼 오래 참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리 없이 시나브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쉽게 떠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늦게까지 참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교회가 왜 이러는가?”가 아니다. 그들은 먼저 이렇게 묻는다.
“내가 잘못 믿어온 걸까?”
“내가 신앙을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이 질문은 무섭다. 이 질문은 교회를 의심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도 교회는 오랫동안 신앙의 기준을 개인에게 두어 왔다. 교회에 순응하면 신앙이 바른 것이고, 의문을 품으면 믿음이 약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실망은 곧 신자의 신앙에 대한 죄책감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기도를 해도 죄를 짓는 것 같고 성경을 읽지 않으면 배교자가 된 것 같고 교회를 비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다시 던져야 한다.
“교회를 떠난 것이 정말 신앙의 실패인가?”
복음서를 천천히 잘 읽어보면 불편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예수와 가장 자주 충돌한 집단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전통을 존중했고 신의 뜻을 말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제도를 신보다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신앙은 체계가 아니라 관계였고, 복종이 아니라 응답이었으며, 안전한 소속이 아니라 위험한 부르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가장 멀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가려다 멈춰 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교회를 떠난 이들 가운데 이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예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신학적으로 모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존적으로는 매우 정직한 고백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못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한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예수다. 예수는 죄인을 향해 먼저 말을 걸었고 종교적 위선을 견디지 못했으며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말하고 실천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바로 이런 예수의 원래 모습은 교회에서 배운 예수와 닮아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르다. 교회에서 배운 예수는 주로 복잡한 신학적 설명의 대상이고, 교회의 원리로 정의되는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무조건 믿어야 할 교리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올리는 예수는 복잡한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밀하게 다가오는 존재였고, 학문적으로 정의되기보다 마음에 직접 부딪히는 인물이었다.
이 책은 당신을 다시 교회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지도 않고, 정답을 빠르게 제공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책이 하지 않으려는 것들은 분명하다. 당신에게 “그래도 교회는 필요하다”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교회 다니면서 들었던 많은 의심을 죄로 만들지 않는다. 질문을 불신앙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책은 하나의 새로운 길을 함께 걸으려 한다. 제도를 통과하지 않고, 예수에게 직접 다가가는 그 길 말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믿음을 더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정직해질 용기를 제안한다. 곧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것을 믿는 척하지 않을 용기, 납득되지 않는 교리를 강요당하지 않을 용기, 마음에 늘 품은 질문을 끝까지 붙들 용기말이다. 교회를 떠난 것은 패배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신앙이 더 이상 타성적인 주일 예배 참석으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예수를 다시 묻기 시작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교회 바깥에서 예수를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교회 안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숨이 막히지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회를 떠난 것이 신앙의 실패라고 너무 쉽게 결론 내리지 말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를 다시 묻기 시작한 가장 정직한 출발일지도 모르니까. 사실 교회를 떠난 이후에도 예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배당을 떠났고 설교를 듣지 않게 되었고 교회 언어가 점점 낯설게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예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교회로부터 멀어질수록 예수는 더 또렷해진다. 이 역설은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사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대개 한동안 종교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기도도 멈추고 성경책도 덮고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피한다. 그런데 이 침묵은 배교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침묵에 가깝다. 오랫동안 신앙은 위에서 부여한 의무였고 싫어도 해야 하는 노력이었고 남에게 증명해야 할 태도였다. 그래서 얼마나 자주 예배에 나오는지 얼마나 많이 헌금하는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교회 교리에 동의하는가 신앙의 척도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앙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 계속해서 점검받아야 할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 뒤 사람들은 먼저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그러나 그 쉼 속에서 뜻밖의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기도를 멈췄는데도, 예수에 대한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이들이 교회에서 배운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은 분, 믿으면 구원받게 해주는 분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 고백의 대상이다. 물론 이 설명은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이 설명 속 예수는 언제나 교회가 미리 만들어 놓은 완성된 답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르친 예수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의심을 유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삶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반면, 교회를 떠난 이들이 다시 떠올리게 되는 예수에 대한 의문은 전혀 다르다. 예수는 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그렇게 자주 충돌했는지, 왜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만 어울렸는지, 왜 율법보다 사람을 앞세웠는지, 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했는지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들은 제도 교회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교회는 예수를 설명했지만, 예수가 왜 위험한 인물이었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결코 종교 지도자와 기득권자에게 편안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을 위로했지만, 동시에 흔들었다. 그는 용서를 말했지만, 그 용서가 기존 질서를 위협했다. 그는 사랑을 가르쳤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그 당시 사회 질서가 확립한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예수는 언제나 오해받았다. 술에 취한 방탕한 자들의 친구, 율법을 무시하는 자, 심지어 신성모독을 자행한 자로 오해받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종교 지도자와 기득권자의 음모로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교회는 이토록 위험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오늘날 모든 교회가 선전하는 대로 이토록 안전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는가?
교회는 원래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그 보호는 곧 독점적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엄격한 교리로 정리되었고, 정형화된 신앙 고백으로 고정되었으며, 신학의 철옹성으로 보호된 의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예수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존재가 아니라 확신을 제공하는 존재가 되었다. 믿으면 천국으로 보내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확신은 편안하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편안함을 약속하지 않았다. 예수가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안전한 길로의 초대가 아니라, 기존의 편안한 길을 떠나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급진성을 점점 희석시켰다. 급진적인 예수는 교회가 확립하려는 제도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예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그가 편안한 길을 보장하는 유용한 존재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너무 불편해서 잊히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옳은 말만 하면서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종교적으로 안전하고 편한 길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러한 예수는 오늘의 제도 교회보다 개인의 실존적 삶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양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들, 권력과 성공의 논리에서 자주 좌절하는 사람들, 교회가 강요한 도그마적인 언어에 상처받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기 전에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예수를 믿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가 요구한 것은 대부분 ‘믿음’이 아니라 ‘따름’이었다. 믿음은 내면의 동의일 수 있지만, 따름은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믿음은 설명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따름은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데는 익숙했지만, 예수를 따르는 데서는 점점 멀어진 것이다. 교회를 떠난 이후 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단순한 맹목적 믿음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질문으로서의 예수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예수를 다시 신격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순한 도덕 교사로 축소하지도 않는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는 하나의 사건이다. 예수는 인간 존엄이 무엇인지, 권력과 신앙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예수를 ‘설명’하기보다 그가 남긴 긴장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려 한다.
교회를 떠난 후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는다. “내 신앙은 끝난 걸까요?” 그러나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신앙의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 신앙은 확신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태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 질문은 삶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종류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 것은 신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거짓된 형태로 유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예수를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에게 붙들리기를 허락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확신을 지지해 주기보다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신앙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회를 떠난 당신이 아직 예수를 떠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미련이 아니라 참된 신앙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감각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당신과 함께 걸으려 한다.
교회를 떠난 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면 정확한 말은 이것에 가깝다.
“확신은 무너졌지만, 질문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질문들은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고, 집요하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대개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끝까지 묻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왜 이 질문들은 교회 안에서 끝까지 묻기 어려웠는가? 교회는 질문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질문에는 늘 보이지 않는 한계선이 있다. 교회가 엄격하게 정한 특정한 지점을 넘으면 “믿음이 약한 것”이 되며 교회가 금지한 질문을 반복하면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다. 이 선은 명문화되어 있지 않지만,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질문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니라 신앙의 결함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질문을 접는다. 답을 얻어서가 아니라, 묻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질문들이 반복된다.
“왜 교회는 권력에 이렇게 약한가?”
“왜 사랑을 말하면서 배타적인가?”
“왜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는 침묵하는가?”
“왜 예수의 말보다 교회의 질서가 앞서는가?”
이 질문들은 교리를 부정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겨난 질문들이다.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교회의 모습은 자주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종 질문을 믿음의 부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삶을 오래 살아온 이들은 안다. 질문은 무지에서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질문은 예수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신뢰했을 때 생긴다. 관심 없는 대상에게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교회를 떠난 이들의 이러한 질문은 신앙을 가볍게 여긴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오래 진지하게 여긴 결과다. 질문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결과일 수 있다.
교회를 떠난 후 많은 사람들이 겪는 또 하나의 경험은 언어의 붕괴다. “은혜”, “사랑”, “순종”이라는 말이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 말들이 너무 자주 남용되었고, 때로는 오히려 사람을 침묵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 후 한동안 말을 잃는다. 그러나 이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찾는 과정이다. 복음서를 다시 잘 읽어보면 의외의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사람들의 질문을 막은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는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려준다. 예수는 자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너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사실 이 방식은 정답을 주는 방식보다 훨씬 무서운 종류의 것이다. 사람을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종 사람들을 오류에서 유혹에서 보호하기 위해 미리 정한 정답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보다 깨어나게 하려 했다.
교회를 떠나며 “내 신앙이 무너졌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무너진 것은 본질적 신앙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을 지탱하던 외적 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그 구조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교리,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확신,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대신 결정해 주는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가 무너질 때에야 비로소 개인은 신 앞에 혼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신앙은 외적인 구조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내리는 결단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결단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 질문 앞에 개인은 홀로 서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 시간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더 이상 쉽게 기도할 수 없고, 확신에 차서 결정할 수 없으며, 단순히 “신의 뜻”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을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이 고독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신앙의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일 수 있다. 예수도 많은 순간 혼자였다. 그는 종교 제도 안에서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고, 항상 경계선상에 서 있었다.
질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진실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에 대해 질문을 멈추는 순간, 사람은 편안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기보다 늘 깨어 있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고민을 하며 자신에게, 교회에 그리고 세상에 하는 질문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이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 책은 당신의 질문에 빠른 정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질문이 왜 생겼는지, 그 질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질문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한다.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는 대개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묻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말기를 바란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질문들은 어쩌면 당신이 예수를 여전히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들과 함께 예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동행하기 위해 쓰였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그럼 이제 혼자서 믿겠다는 건가요?”
“제도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에는 호기심보다 우려가, 사유보다 경고가 섞여 있다. 교회는 오래도록 신앙과 제도를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났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종종 그가 개인주의와 영적 독단에 빠지고 책임 없는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공동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더 이상 에클레시아 곧 참다운 예수 공동체처럼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도 교회는 서로를 보호하기보다 감시하고 평가하며, 신자가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침묵을 강요받는 구조를 굳게 견지하고 있다.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공동체의 부정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에 대한 절망의 고백일 수 있다.
예수의 직제자가 중심이 되어 세운 초대 교회, 이른바 ‘다락방 공동체’는 지금 우리가 아는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성직자 계급은 확립되지 않았고, 정경은 완성되지 않았으며, 신앙은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고백 이전에 실존적 삶의 방식 자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국교가 되면서 신앙은 점점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신앙의 질서를 위해 경계를 짓고, 교회와 그 제도의 안전을 위해 권위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제도는 신앙을 돕는 틀이 아니라, 신앙의 통과 의례가 되었다. 물론 제도는 필요하다.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가 그 자신을 절대화할 때 발생한다. 교회 제도를 지키는 것이 곧 신앙을 지키는 것이 되고,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곧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제도를 떠나는 것이 곧 배교로 간주될 때 제도는 더 이상 신앙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되어 버린다. 다름 아닌 예수가 바로 이러한 전환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 당시 형식주의에 철저히 물들어 버린 유대교는 예수의 눈에 더 이상 참다운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대표자들은 신의 뜻이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독사의 족속’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예수는 유대교 전통 안에서 자랐지만, 결코 그 제도의 중심에는 서지 않았다. 그는 성전보다 길 위에 있었고, 율법학자보다 소외된 이들, 가난한 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픈 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결코 제도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의 사랑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안식일 논쟁에서 그가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은 단순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가?”
이 질문은 모든 종교 제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우려한다.
“제도 없이 믿으면 각자 자기 방식대로 믿게 되지 않나요?”
물론 이 질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반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제도가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더 나아가 바르게 살고 있었는가?”
제도는 통일성을 보장하지만, 결코 진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제도 없는 신앙이 방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제도 있는 신앙은 늘 성숙했는가? 사실 제도를 떠난 신앙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더 어렵다. 누구도 대신 판단해 주지 않고, 누구도 대신 책임져 주지 않으며, 누구도 대신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비로소 개인의 실존적 삶과 직접 연결된다. 예수는 바로 이 길을 “좁은 길”이라 불렀다.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함께 가기에 편하지만, 좁은 길은 각자가 스스로 걸어야 한다.
이 책은 제도를 파괴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제도가 신앙의 주인이 되는 순간을 경계하자고 말한다. 제도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람을 침묵시키고, 양심을 마비시키며, 질문을 죄로 만들 때 그 제도는 이미 예수의 길과 멀어져 있다. 교회를 떠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여전히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 실존적 삶에서 제기되는 질문과 신앙의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의 말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제도 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위계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고정되지 않고, 하나의 정답을 가진 자보다 함께 묻는 자들이 모이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결코 이상적인 꿈이 아니라, 초대 예수 공동체가 잠시나마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제도 밖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말과 삶을 최종 기준으로 삼겠다는 결단이다. 교회의 가르침, 전통적인 권위적인 해석이 아니라, 예수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시 진지하게 묻는 일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제도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답할 수 있다.
“예수 없이 제도만 남은 신앙이 과연 신앙인가?”
이 책은 제도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제도가 가려버린 예수를 다시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에게로 간다. 우리가 다시 예수에게로 간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더 순진했던 시절로, 확신이 흔들리지 않던 시절로 후퇴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통과한 이후의 선택이다.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누님의 선택이다.
사실 교회를 떠난 뒤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가 교회를 세운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는 늘 변두리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말했고, 으스대는 종교 권력자가 서 있는 중심을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을 때는 이 사실들이 자주 흐려진다. 제도와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예수의 급진성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은 많이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자주 왜곡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 회심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더 ‘순수한’ 공동체를 찾겠다는 말도 아니다. 이 책이 말하는 예수에게로의 귀환은 예수를 더 이상 권위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를 다시 읽어야 한다. 예수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익숙한 문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왜 그는 늘 권력자보다 가난한 이들 곁에 있었는가?”
“왜 그는 종교적으로 가장 ‘올바르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가장 많이 충돌했는가?”
“왜 그는 끝내 제도 종교의 기득권자들의 사주로 제거되어야 했는가?”
사실 이 질문들은 신앙을 강화하기보다 불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를 진지하게 읽는다면, 불편함은 피할 수 없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특정 교리를 받아들이는 행위로 축소되어 왔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것은 그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그가 내린 결단을 따라 하고, 그가 감행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안온한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위험한 실존적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책은 완전한 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신이 없을 때에도 걸을 수 있는 길을 말한다. 사실 예수의 직제자들도 처음부터 확신에 찬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의심했고, 도망쳤고,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질문을 안고 계속 걸었다. 신앙은 확신의 상태가 아니라, 방향의 선택일 수 있다. 교회를 떠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데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는 여전히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삶을 조용히 위로만 해주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이 책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려 한다. 예수를 둘러싼 제도의 언어를 벗기고, 신화적 과장을 걷어내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예수를 만나고, 오늘의 실존적 삶 안으로 그를 데려오는 일을 추구한다. 물론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그만큼 정직하다. 이 길은 혼자만의 여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같은 질문을 안고 비슷한 지점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 있다. 이 책은 그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유일하고 확실한 정답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견디는 공동체를 위해 쓴 책이니 말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초대할 뿐이다.
“와서 보라.”
이 초대는 지금도 유효하다. 제도를 통과하고 그 안에 머물지 않아도, 신앙의 확신이 완전하지 않아도, 예수와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초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교회를 떠난 것은 결코 신앙의 실패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를 다시 묻기 시작한 가장 정직한 출발점일 수 있다. 이제 이 책은 그 질문을 안고 예수에게로 천천히, 그러나 진지하게 걸어가려 한다. 당신도 함께 걸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