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지도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역적 윤석열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지 1년이 넘도록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다. 법은 여전히 느리고, 정의는 여전히 지연되고 있다. 그 사이 국가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과거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우리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는 눈부실 정도다. 적어도 수치로 보자면 그렇다. 코스피와 코스닥 지수는 지속적으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한동안 냉각되었던 중국과의 관계도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시절 희화화되고 경박해졌던 미국,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재정비되고 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국정은 안정되고 있고, 시장은 호응하고 있으며, 국제사회 또한 한국을 다시 '예측 가능한 국가'로 대하기 시작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정치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경제 지표가 개선되었다고 해서 사회가 곧바로 통합되는 것도 아니고,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재명 정부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과의 부재가 아니라, 성과가 있음에도 사회가 전혀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영남을 기반으로 한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약 30%에 달하는 ‘콘크리트 반대파’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정책을 보지 않는다. 성과를 보지 않는다. 사실관계조차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이재명은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이재명 죽이기'는 이들에게 하나의 정치적 신앙이 되었고, 거의 염불에 가깝게 반복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민주주의는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선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의 일정 부분은 이미 그 전제를 벗어나 있다. '죽어도 싫어'라는 감정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가 되었고, 이 정체성은 논증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아무리 잘해도 60% 초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가 드러난다.
이 나머지 30%는 단순한 야당 지지층이 아니다. 이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선거 결과를 민주적 합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여전히 'Yoon Again!'을 외친다. 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기형적인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한 집단적 집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직후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서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약속이다. 그는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역, 계층, 이념을 넘는 메시지를 던지고, 적어도 언어 차원에서는 배제보다 포용을 선택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국민의힘이라는 자칭 제2 원내 정당은 이미 하나의 정상적인 보수 정당이라기보다, 극우 정치와 종교 연합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통일교와 신천지로 상징되는 사이비 종교 세력, 그리고 극단적 반공, 반이재명 정서가 이 당의 의사결정을 사실상 좌우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통합을 말하지만, 상대는 통합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통합은 두 주체 모두가 최소한의 규칙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한쪽이 민주주의의 결과를 부정하고, 상대를 ‘적’이 아니라 ‘제거 대상’으로 인식하는 순간, 통합은 정치적 미덕이 아니라 자기 소모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은 날카로워진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끝까지 통합을 시도하다가 정치적 에너지를 소진하는 길.
둘째, 지지 기반을 명확히 하고 구조 개혁에 집중하는 길.
셋째,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제도와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길.
문제는 세 번째 선택지다. 이 선택지는 가장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
이재명의 정치가 혁명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구조의 재편일 것이다. 검찰 권력, 언론 권력, 관료제, 재벌 중심 경제 구조, 지역주의 정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역설이 있다. 혁명은 언제나 저항을 낳는다. 이미 이재명 대통령은 전례 없는 수준의 사법적, 정치적 공격을 받아왔다. 그가 정권을 잡은 지금도 그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만약 그가 본격적으로 구조를 흔들기 시작한다면, 저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질문형이다.
“이재명의 혁명은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부제는 바람에 가깝다.
“환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구조적 개혁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한 정치인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극단주의와 혐오 정치에 맞서 아직 유효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공의 기준은 명확해야 한다. 지지율이 아니다. 경제 지표도 아니다. 외교적 ‘정상화’도 아니다. 성공의 기준은 단 하나다. ‘권력이 더 이상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게 되었는가?’이다. 여기에 더해 ‘국가가 시민을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정치가 다시 윤리를 회복했는가?’라는 질문도 이어진다.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재명의 혁명이 환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재명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이재명 대통령의 ‘원맨쇼’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그의 지지자들의 자발적이면서 ‘적극적’인 동행이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재명 혁명의 성패는 대통령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시민들의 태도와 실천에 달려 있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험한 순간은 권력을 잡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권력을 잡은 이후다. 이때 지지자들은 쉽게 두 가지 유혹에 빠진다. 하나는 무비판적 숭배이고, 다른 하나는 안이한 방관이다. 둘 다 혁명을 망친다.
이재명의 지지자들이 먼저 버려야 할 태도는 ‘대리 정치’에 대한 환상이다. 투표로 모든 책임을 끝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민은 다시 객체로 전락한다. 혁명은 위임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동행과 감시, 그리고 무엇보다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구조 개혁을 시도할수록, 지지자들은 박수만 치는 관객이 아니라 방패와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 지지자들은 정책 시민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이재명이니까 옳다'가 아니라, 무엇이 왜 옳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검찰 개혁이 왜 필요한지, 언론 구조 개편이 왜 민주주의의 문제인지, 재벌 개혁이 왜 시장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인지를 언어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극우 세력은 감정으로 결집하지만, 민주주의는 이성적 설명을 통해 확장된다. 이 설명의 노동을 정치인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둘째, 지지자들은 폭력과 혐오로부터 혁명을 분리해내야 한다. 극우 정치의 가장 큰 무기는 상대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조롱, 낙인, 인신공격은 언제나 그들이 먼저 사용해 온 방식이다. 이재명 지지자들이 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순간, 혁명은 윤리적 정당성을 잃는다. 혁명은 급진적일 수는 있어도 천박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동력이 될 수 있지만, 혐오는 방향을 망가뜨린다.
셋째, 지지자들은 법과 제도의 언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가장 합법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질 때 지속된다. 극우 세력은 늘 '법치'를 외치지만, 정작 법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재명 혁명의 지지자들은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법을 무기로 삼지 않고, 법을 규칙으로 존중하면서도, 그 법이 왜곡되었을 때는 끈질기게 고쳐 나가야 한다. 느리더라도, 이 길만이 혁명을 제도로 남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넷째, 지지자들은 이재명을 보호하되, 신격화하지 말아야 한다. 이재명은 구세주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행위자이며, 실패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를 비판 없이 떠받드는 순간, 이재명의 혁명은 스스로 권위주의의 씨앗을 품게 된다. 창다운 동행은 맹종이 아니라 긴장이다. 필요할 때 지지하고, 필요할 때 요구하며, 필요할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정치권력은 시민 아래에 머문다.
다섯째, 지지자들은 일상의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한다. 혁명은 국회와 청와대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직장, 학교, 지역 공동체, 온라인 공간에서 민주적 언어와 태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어떤 제도 개혁도 공허해진다. 극단주의는 언제나 일상의 균열에서 자라난다. 이재명의 혁명의 지지자들이 일상에서 차별에 침묵하지 않고, 허위 정보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선택을 반복할 때, 혁명은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결국 이재명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다. 대통령이 시민을 계몽하는 구조가 아니라, 시민이 대통령을 떠받치되 통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앞에서 길을 내고, 시민들이 그 길을 넓히고 굳히지 않는다면, 그 길은 언제든 되돌려질 수 있다.
그래서 이 혁명은 빠를 수 없다. 조급할 수도 없다. 그러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극우는 오래 기다릴 줄 안다. 혐오는 끈질기다. 기득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상대로 싸우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지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다수의 시민이 존재할 때만 역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이재명의 혁명이 환상이 아니기를 바란다면, 그 환상을 현실로 바꾸는 노동을 대통령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혁명은 위에서 시작될 수는 있지만, 완성은 언제나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이재명이 혼자 걷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멈춰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 긴장 속의 동행, 그 불편하지만 성숙한 관계 속에서만, 이재명의 혁명은 비로소 개인의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역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혁명은 서두르지 않지만 단 한순간도 멈추면 안 된다. 오래된 격언처럼 말이다. Ohne Hast, ohne H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