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청년의 '기다림', 한국 청년의 '낙오'

청년 비정규직 31.7% 시대, 실패가 '낙인'이 되는 구조

by Francis Lee

독일의 진보 계열 주간지 <슈피겔>은 최근 “젊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더 이상 선호되지 않는다”(Jung, top ausgebildet – und nicht mehr begehrt)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독일 청년 고학력자들의 취업 현실을 다뤘다. 기사에는 실제 취업 준비를 겪은 청년들의 좌절과 불안, 그리고 장기화한 대기 시간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수치로 볼 때 독일 청년 고학력자 실업 문제는 심각하다. 2025년 기준, 30세 미만 청년 고학력자 가운데 약 45,000명이 실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사실 독일에서 최근 2년간 고학력자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상승했다. 2022년에 2.2%였던 것이 2025년 3.3%로 1.1%p나 증가한 것이다. 다만 이는 아주 낮은 수준에서의 증가이며, 구조적 위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에서 고학력자의 실업 위험은 비숙련 노동자와 비교하면 약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 기사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취업 준비생들의 개인적 경험이다. 반복되는 지원, 불확실한 미래, 기다림에서 오는 심리적 소진이 강조된다. 그러나 기사에 등장한 사례들 대부분은 결국 비록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취업에 성공했거나, 다른 진로를 모색하며 만족을 찾고 있다는 점도 함께 제시된다. 그래서 이 기사는 ‘청년 고학력자 위기’라는 표현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개인 차원의 좌절은 분명 존재하지만, 이를 곧바로 사회적, 구조적 위기로 일반화하는 것은 아직 과도하다는 것이다. 사실 독일은 여전히 국제적으로 매우 낮은 청년 실업률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고학력 청년층의 고용 상황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도 양호한 편이다. 물론 현재 취업 진입이 과거보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더 많은 지원, 더 높은 유연성, 더 큰 타협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 경기 침체의 영향이 크며, 경제 상황이 회복되면 청년 고용은 다시 빠르게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험적 판단이다. 다만 청년 실업 문제는 단순한 경기 순환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노동시장 전문가 엔초 베버(Enzo Weber)는 이를 ‘전환의 위기’(Erneuerungskrise)로 규정한다. 산업 전환 속도에 비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충분히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베버는 독일의 강점을 강조한다. 곧 높은 교육 수준과 숙련된 인력 구조 덕분에 독일은 산업 전환과 신기술 개발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결론적으로 독일 청년 고학력자의 취업 환경은 어려워졌지만, 위기라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실업 그 자체보다 산업 전환 속도의 부족에 따른 일시적 일자리 부족 현상이다. 그래서 향후 독일 경제의 관건은 이 잠재력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과감하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 현실과 독일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에서도 청년 실업률은 숫자만 보면 ‘위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청년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훨씬 가혹하다. 전체 실업률(약 2.8%)은 낮지만, 청년 실업률은 그 2배가 넘는 6%대다.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처참하다. 2026년 1월 발표된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한국의 청년 고용률은 45.0%로 전년 대비 1.1%p 하락했다. 전체 고용률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사이, 유독 청년층만 고용의 문턱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특히 구직 활동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은 41만 명을 넘어서며 22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막상 취업해도 그 이후의 삶이 만만치 않다.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자리가 '안정적 궤도'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2025년 말 통계에 따르면, 20~30대 청년 임금근로자 3명 중 1명(31.7%)은 비정규직이다. 이는 2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특히 비정규직 중 절반 이상이 시간제 근로(알바 등)로 채워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첫 직장이 경력의 출발점이 아니라, 또 다른 불안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독일 청년들이 ‘더 나은 기회’를 위해 잠시 멈춰 서 있다면, 한국 청년들은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일자리에 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독일 청년에게 취업 지연은 ‘건설적인 조정’의 시간이지만, 한국 청년에게 취업 실패는 ‘낙오의 경험’이 될 뿐이다. 이 차이는 개인의 노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차이다.

위에서 언급된 엔초 베버가 말한 ‘전환의 위기’에 맞서 독일은 전환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다. 직업교육, 중견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 재배치 가능한 노동시장 덕분이다. 그런데 한국은 다르다. 산업 전환은 빠르지만, 실패의 비용은 철저히 개인화된다. 국가도, 기업도, 사회도 청년에게 ‘다시 준비하라.’라고 말할 뿐, 그 준비의 시간을 버틸 안전망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청년 문제는 단순한 고용 문제가 아니다.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문제다. 독일 청년이 ‘조금 늦게 시작해도 된다’라고 느낀다면, 한국 청년은 ‘한 번 늦으면 끝’이라고 느낀다. 그 심리적 압박감은 생존의 문제가 될 정도다. 그래서 청년 고용 위기를 말할 때 숫자보다 구조를 봐야 한다. 독일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청년 고용이 무너지지 않았다’라는 낙관이 아니라, 왜 무너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은 청년에게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법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설 수 있게 만드는 사회의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는 한국 사회이기에 오래전부터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게 되었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틀렸다고 지적받아 왔다. 그리고 과도한 자기 비하, 국제 비교 없는 비관, 노력 혐오의 언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이 단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태를 바꿔 계속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헬조선’은 한국 사회의 분석 ‘결과’가 아니라 만성적 ‘증상’을 보여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정확히 분석하고 설명하지는 못해도, 자신의 삶이 꽉 막혀 있다는 감각에는 솔직하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통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절박한 상황에 대한 체감의 언어이고, 정책 보고서가 아니라 삶의 좌절이 굳어져 나온 표현이다. 그런데 매우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이 단어를 둘러싼 논쟁이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정말 지옥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논쟁만 반복했지, 정작 왜 이런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지는 충분히 묻지 않았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혐오하고 비판하는 측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그래도 한국이 외국보다 낫다.’라는 반론이다. 이 반론의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OECD 중위권 이상이다.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남유럽보다 낮다. 한국은 더 이상 ‘굶어 죽는’ 나라는 아니다. 물론 이 말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반론에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 한국 청년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미래의 봉쇄’이기 때문이다. <슈피겔>이 다룬 청년 고학력자 실업 기사에서도 독일 청년들은 ‘독일이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안은 있지만, 기다리면 나아질 것이라는 여러 ‘사회적 신호’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청년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취업이 늦어지면 문자 그대로 ‘루저’, 곧 패자가 된다. 첫 직장이 경력의 출발이 아니라 ‘낙인’이 되기도 한다. 마치 어느 대학교에 입학하는가가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취업 실패는 사회의 모순적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무능 탓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한국에서 청년이 느껴야 하는 절망은 가난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언젠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멈추면 끝이 아니냐?’의 문제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독일 청년과 한국 청년의 결정적 차이는 ‘실패’의 의미에서 나온다. 독일 청년 고학력자 실업률은 최근 상승했지만, 여전히 낮다.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라 실패의 처리 방식이다. 독일에서 취업 실패는 재조정의 시간, 추가 훈련의 계기, 다른 경로로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반면에 한국에서 취업 실패는 이력서의 공백, 상세히 설명해야 할 결함, 개인 능력 부족의 증거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는 학력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독일에는 직업교육과 재교육 시스템, 중견기업의 고용 흡수력, 산업 전환 과정에서의 재배치 구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스펙 경쟁만 남은 교육, 청년을 흡수하지 못하는 산업 구조, 실패를 개인 책임으로 전가하는 담론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독일 청년의 불안은 지연된 출발이고, 한국 청년의 불안은 영구적 정체에 가깝다.


‘헬조선’을 외치는 한국 청년들은 한국이 정말 지옥이 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회는 내가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 말은 감정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순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이미 유치원 교육 때부터 시작되는 경쟁적 교육에 이어지는 노동시장의 진입, 그리고 그 후에 치열하게 추구하는 주거 안정과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가족의 형성이라는 연쇄 고리가 어디에서든 한 번 끊어지면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보장이 거의 없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다. 그래서 한국 청년들은 불행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 없이 그냥 무한 경쟁 시장에 내던져진 자신의 삶에 절망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헬조선 담론의 정치적 오용이다. 보수 진영은 좌절한 청년들에게 ‘그래도 네가 스스로 노력하면 된다.’라고 응답했고 진보 진영은 ‘분노는 이해하지만, 특별한 대안은 없다.’로 회피했다. 그 결과 ‘헬조선’은 정책의 언어로 번역되는 선순환 과정에 이르지 못한 채, 그저 냉소와 혐오의 언어로 고립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독일 사례가 보여주듯, 청년 고용의 핵심은 근거 없는 낙관이나 각성이 아니다. 청년 세대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붕괴로 누적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회적 복원력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고민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더 노력하라’는 훈계가 아니라, 한 번 넘어져도 다시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안전한 트랙’을 까는 일, 그것이 ‘헬조선’이라는 만성적 고통을 끝낼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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