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기독교 논리의 해석학적 맹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갈등의 정점에는 늘 ‘보수 기독교’가 있다. 이들은 동성애와 동성혼 반대를 신앙의 최전선 과제로 삼으며, 이를 “성경적 가치 수호”라 명명한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확신만큼 성경의 증언이 명확할까? 성서학적 텍스트와 역사적 맥락을 면밀히 교차 검토해 보면, 보수주의의 논리는 견고한 신학이라기보다 선택적 해석에 기반한 ‘해석학적 도그마’에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보수 진영이 가장 먼저 전면에 내세우는 근거는 구약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 나오는 “남자가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면 가증한 일”이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증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토에바’(תּוֹעֵבָה)는 오늘날 현대인이 이해하는 식의 도덕적 절대 악보다는 유대교의 독특한 종교적, 의례적 부정함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 가나안의 우상 숭배 의식 중 하나였던 '신전 남창' 제도와 구별되기 위한 용어였다. 유대교는 일찍부터 정결례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던 종교였다. 유대교는 유대인인 신의 뜻으로 선택된 민족이기에 다른 종족보다 순결해야 된다는 종교적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선민사상이 지나쳐 율법에만 몰두하며 정작 인간을 신과 닮은 모습을 지닌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신의 뜻을 소홀히 하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가 유대교 성직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하게 된 발단이 바로 이런 정결주의, 또는 순결주의였다. 그런데 동성애를 둘러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기독교가 유대교의 율법 전통을 '복음'으로 극복했다고 자처하면서도, 특정 대목에서는 다시 유대교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보이는 더 큰 모순은 ‘일관성’에 있다. 레위기에는 동성 간 성행위 금지뿐 아니라 돼지고기 섭취 금지, 혼방 섬유 옷 착용 금지, 월경 중인 여성과의 성행위 금지 규정 등이 나란히 나온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러한 예식법이 폐기되었다며 삼겹살을 즐기고 옷도 자유 분방하게 입고, 이혼이나 혼전 순결 등 자신들이 불편해하는 성적 규범에는 관대하면서 유독 동성애 규정만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도덕법’이라며 결사반대를 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정결례를 지킬 요량이라면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이혼이나 재혼, 혹은 성적 순결 문제에 대해서는 신앙적 관용을 베풀면서도, 유독 사회적 소수자들의 동성애에만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 도덕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진정으로 레위기의 정결례를 문자 그대로 수호하려 한다면, 그들은 식탁 위의 삼겹살을 치워야 함은 물론, 모든 성관계의 목적을 오직 출산으로만 제한하는 근본주의적 통제 아래 스스로를 가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금육과 금욕에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결국 이는 성경의 텍스트를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라기보다,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해석학적 비일관성’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룩한 책을 이용하는 신성모독적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1장 26~27절에 나오는 ‘순리’와 ‘역리’ 논쟁도 시대착오적 해석의 산물이다. 바울이 비판한 당시 로마 사회의 동성 성행위는 오늘날과 같은 ‘성적 지향’에 따른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 바울이 비난한 것은 가부장적 권력을 가진 남성이 어린 소년이나 노예를 성적으로 부리는 소아성애적 ‘착취 관계’나 이방 종교 신전의 음란한 제의와 결부된 행위였다. 바울의 비판 대상은 타락한 권력과 우상 숭배였지, 상호 존중과 사랑에 기반한 현대적 의미의 동성 관계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 텍스트가 나온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2,000년 전의 단어를 오늘날의 현상에 일대일로 대입하는 것은 학문적 태만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다.
그런데 구약이나 바울 서신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당혹해할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윤리의 최종 권위자인 예수는 생애 단 한 번도 동성애에 대해 언급하거나 정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예수는 율법의 문자에 매몰되어 사람을 심판하던 당대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며 그들의 위선에 독설을 퍼부었다. 예수의 공생애는 세리, 창녀, 나병 환자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 심지어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으로 불린 이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루는 ‘급진적 환대’의 연속이었다. 예수의 언행에서 읽을 수 있는 사실은 진정한 죄라는 것이 개인의 성적 지향의 차이가 아니라, 율법이라는 칼날로 타인의 존엄성을 난도질하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정죄의 논리는 예수가 그토록 경계했던 율법주의적 독선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또 다른 근거로 내세우는 창세기 1~2장의 아담과 하와가 부부를 이루는 것을 근거로 한 ‘창조 질서’ 논리 또한 빈약하다. 성경이 남녀의 결합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양식으로 서술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곧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 방식은 불법’이라는 배타적 규범으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신학적으로 ‘창조’는 고정된 박제 모델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양성을 확장해 나가는 생명의 과정이다. 생물학적 구조의 일치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사랑, 책임, 신뢰가 창조의 섭리에 부합하는 핵심 가치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단죄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연의 질서’라는 명분은 노예제와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악용을 이제 동성애에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에 나온 예수의 메시지는 혐오를 위한 무기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나침반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특정 구절을 파편화하여 소수자를 공격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교회가 고민해야 할 과제는 “누구를 적대시하여 공동체에서 배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예수가 보여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것인가?”에 있다. 그래서 동성애를 둘러싼 작금의 논쟁은 기독교가 낡은 도그마의 요새 속에 갇힐 것인지, 아니면 차별 없는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할 것인지를 묻는 시대적 시험대다. 이 시험에 걸려 넘어진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