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신이 되려는 지도자”를 선택하는가?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자신을 예수와 유사하게 묘사한 이미지를 게시했다가 거센 비판 속에 약 12시간 만에 삭제했다. 이 이미지는 병자를 치유하는 장면 속에서 ‘구원자’로 등장하는 형상이었고, 심지어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기독교 진영 내부에서도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트럼프는 이를 “의사로 묘사된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는 이미 자신을 “왕”에 비유하거나, 예수의 박해와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반복해 왔다. 이러한 행위는 독일어로 흔히 “Gott spielen”(신을 연기하다)라고 표현된다. 문제는 이것이 특정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인간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의 심리, 곧 인간인 주제에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특히 정치나 종교 권력자가 자신을 신적 존재로 동일시하려는 충동은 여러 가지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비롯된다.
먼저 인간 심리에는 과잉 자기확신(Hubris)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지닌 권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Hubris’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오만을 의미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동일하다. 절대 권력을 지닌 권력자의 오류를 교정해 줄 외부 피드백이 점차 제거되고 나면 그 권력자는 점점 자신을 다른 모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매우 예외적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또한 특히 기독교 세계에서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구원자 콤플렉스 (Messiah Complex)다. 이와 관련해서 트럼프가 보여준 AI 이미지가 단순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치유자”로 등장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과대망상에 빠진 정치 지도자가 흔히 지니게 되는 “내가 아니면 나라가 망한다”, 더 나아가 과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말한 것처럼 ‘내가 바로 나라다’는 인식과 연결된다. 그래 정치 지도자 자신이 나라인 것이기에 자신의 승리가 나라와 국민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나라를 구하는 구원자의 행위이고 그를 반대하는 모든 것은 나라를 구하는 데 맞서는 악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트럼프와 같은 정치가의 사고 구조는 종교적 서사와 동일한 형태를 띠게 된다. 그래서 트럼프는 자신을 구세주와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트럼프가 이런 자신의 과대망상을 소셜 미디어에 수시로 올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상징 정치(Symbolic Politics)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AI 이미지, 밈(meme)이 난무하난 소셜 미디어는 지도자를 “인간”이 아니라 “신화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된다. 실제로 트럼프의 정치 담론에서는 ‘God Emperor’ 같은 표현이 온라인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 왔다. 이는 정치가 종교적 상상력으로 재구성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트럼프를 반대하는 세력도 ‘No King’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부리는 이런 소란 현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는 로마 제국 황제들이 자신을 신격화했다. 로마 제국의 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양어버지인 줄리우스 시저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이라는 호칭으로 추존한 다음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로 자칭했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성자(Filius Dei)로 지칭한 것과 같다. 그런데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기독교보다 이런 표현을 훨씬 먼저 사용했다. 기독교에서는 325년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니케아 신조에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공식 선언했는데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예수 생존 시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후 칼리굴라 황제는 아예 스스로를 신으로 선포했고 네로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백성에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런 황제 숭배는 단순한 권력 유지 수단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권력자의 자기 인식 변화의 결과였다.
트럼프 이전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민족의 구원자를 자처했고 북한의 김일성도 대표적인 신격화된 지도자의 유형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선전 선동으로 이미지 조작을 한 결과로 나타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적 사명자로 인식했음이 거의 분명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반복되는가? 그 핵심은 인간 본성에 있다. 인간은 삶에서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이기를 갈망한다. 곧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된 존재”이고 싶어 한다. 여기에 더해 권력은 인간이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절대 권력은 반대 의견을 제거하고, 지도자를 점점 더 절대화한다. 여기에 더해 대중도 ‘신적 지도자’를 원한다. 특히 불확실성이 더욱 강화된 매우 불안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한 방에’ 해결해 줄 “구원자”를 찾는다. 그래서 이 문제는 지도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심리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의 결말은 항상 같다.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결론을 보여주는 것이다. 절대 권력을 누리던 로마 황제는 수시로 암살되거나 권력 기반이 붕괴되었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무솔리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결국 개인숭배 체제가 공고해질수록 특히 측근의 주도로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근본적 이유는 인간이 신이 되려는 순간, 인간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못 보는 독재자는 이성적 판단을 못하게 되고 그런 과정이 길어지면 내적 모순으로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그 독재자를 비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판단은 왜곡되고 결국 현실과 단절된 권력은 스스로 붕괴한다. 한국의 이승만과 박정희도 이 계열에 속한다.
그렇다면 “신이 되려는 인간”을 막는 방법은 있는가? 일단 이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에 맡길 수 없다. 권력을 잡으면 하찮은 조직의 권력자도 ‘타락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권력자의 갑질과 성추행의 근본 원인은 인간 심리의 깊은 속에 자리하고 있기에 개인의 반성과 결단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의 분산으로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모색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여 다양한 비판 세력에 힘을 보탠다. 그러나 이런 제도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민주주의적인 나라로 자처하던 미국이 보여주는 ‘꼴’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정치의 탈종교화가 시급하다. 정치 지도자를 “구원자”로 여기는 순간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그런데 여러 나라에서 이런 시행착오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탈종교화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의 성숙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무엇보다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강한 지도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지도자나 종교 지도자도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
트럼프의 이번 사건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권력과 인간 심리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례다. 인간은 반복해서 신이 되려 했고, 그때마다 동일한 결말을 맞이했다.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계속해서 “신이 되려는 지도자”를 선택하는가?
사실 인간은 반복해서 “구원자”를 기다린다. 기독교 신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오래되어 지치게 되면 인간은 그 구원자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린다. 정치 지도자에게서, 또는 종교적 권위를 가장한 사이비 목사에게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그런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헛된 욕망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가?
이성의 시대인 21세기의 인간이 여전히 종교적 메시아를 정치가에게 갈망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심리적·존재론적 구조에 뿌리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경제 위기, 전쟁, 사회적 불평등은 개인에게 통제 불가능한 현실을 강요한다. 여기에 더해 환경 파괴와 6000여 년 전 지구를 강타한 운석이 또다시 지구를 대재앙으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도 인간의 무기력감을 가중시킨다.
이때 인간은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기보다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를 원한다. 그런 인간 심리를 파고든 정치가나 종교 지도자가 “내가 해결하겠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 본능과 나태함이 결합된 메시아 신앙에서 이런 거짓 메시아를 선택하는 것은 단지 희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타자에게 넘기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인간 각자가 져야 하는 선택의 책임, 실패에 대한 책임, 도덕적 판단의 책임을 모두 “위대한 지도자”에게 위임하는 순간, 개인은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여기에서 메시아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책임을 대신 짊어지는 존재다.
여기에 더해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욕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존재”다. 메시아 서사는 세계를 선과 악, 구원과 타락이라는 명확한 이야기 구조로 재구성한다. 이 구조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선한 편”에 위치시키고 지도자를 “구원자”로 설정한다. 이것이 종교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그런 구원자와 자신의 편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악이며 적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메시아는 종교의 영역에 속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그 역할이 점점 정치로 이동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데 비해 정치의 역할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가속화된 세속화로 종교는 개인의 내면 문제를 다루는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반면에 정치권력은 여전히 경제,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삶의 조건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나중에 올 진짜 메시아보다 당장 “실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메시아”를 정치에서 찾는다. 종교는 대개 인내와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를 메시아를 하염없이 기다리라고만 한다. 그러나 정치적 메시아는 즉각적인 변화, 빠른 결과, 단순한 해결책을 약속한다.
그리고 최근 등장한 소셜미디어는 지도자를 인간이 아니라 상징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강력한 이미지, 반복되는 메시지, 팬덤 문화는 지도자를 현실의 정치인이 아니라 “구원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치적 메시아보다 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 숭배다. 이 현상은 여러 조건에서 강화된다. 먼저 현대 사회의 개인의 붕괴와 공동체의 공백이 있다. 사회적 고립, 경제적 실패, 인간관계의 붕괴는 개인을 극단적으로 취약하게 만든다. 이때 교주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삶 전체를 재구성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이비 종교는 절대적 확실성을 제공한다. 사이비 종교는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이비 교주는 “우리는 선택받았다”, “밖은 모두 거짓이다”, “나만이 진리를 안다”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주입하고 이런 메시지는 결국 불안한 개인에게 강력한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
사회학자 Max Weber가 말한 대로 “카리스마적 권위”는 합리적 검증을 거부한다. 교주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비판 불가능한 절대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정치계와 종교계에서 무한 반복되어 온 것이다.
결국 문제는 메시아적 지도자가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인간에게 있다. “신이 되려는 지도자”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이 권력을 갖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을 견디고 자유를 감당하며 책임을 스스로 떠안기보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고 싶어 한다. 그래야 근심걱정 없는 안온한 삶이 이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헛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에서도 종교에서도 새로운 “메시아”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트럼프가 싫다면 가장 먼저 내가 정신 차려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