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선성에만 의지하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쓸모 있는 인간이 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며 성장해 왔다. 그런데 이 말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 기여를 독려하는 긍정적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냉혹한 기준이 숨어 있다. ‘쓸모 있음’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순간, 그 반대편에는 필연적으로 ‘쓸모없음’이라는 낙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존재. 곧 어린이, 노인, 병자, 장애인, 더 나아가 단순히 경쟁에서 뒤처진 많은 사람은 과연 ‘필요 없는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를 넘어, 실제로 20세기 초 전체주의 국가들이 던졌던 위험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복지국가는 이러한 사고에 대한 일종의 반성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과 무관하며, 사회는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원칙이 제도화된 것이다. 연금, 의료보험, 공공부조 같은 장치들은 ‘쓸모없음’이라는 낙인을 지우고, 인간의 존엄을 최소한으로나마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이때 중요한 변화는, 인간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합의는 다시 흔들리고 있다. 저성장, 고령화, 재정 부담 증가는 복지국가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낳고, 많은 국가에서 복지 축소나 선별적 복지 강화라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가 더 가치 있는가’를 가르는 기준이 은근히 재등장한다는 점이다. 생산 가능성, 노동 참여 여부, 세금 기여도 같은 지표들이 인간의 권리를 차등화하는 근거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AI의 등장으로 이 균열이 한층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AI는 단순 노동뿐 아니라 고도의 인지 노동까지 대체하기 시작하고 있다. 과거에는 “노력하면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최소한의 희망으로 작동했지만, AI 시대에는 그 전제가 흔들린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계보다 경쟁력이 없을 수 있다. 이때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만약 사회가 여전히 ‘쓸모’라는 기준에 집착한다면, 상황은 디스토피아적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체제에서는, 인간 자체보다 시스템의 안정과 성장이 우선된다. 그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존재’는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고,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교묘한 프레임에 따른 경제적 배제와 사회적 고립은 충분히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는다.
물론 이 문제는 기술보다는 인간의 양심적 선택의 문제다. AI는 단지 도구일 뿐이며, 그것이 인간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쓰일지, 아니면 인간의 삶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쓰일지는 사회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I로 생산성이 극대화된다면 그 이익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대신,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서비스로 재분배할 수도 있다.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가치 기준이 아니라면, 돌봄, 관계, 창의성, 공동체 참여 같은 비경제적 활동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즉, ‘쓸모’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선택도 가능하다.
결국 이 문제의 핵심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있다. 인간이 단지 생산하는 존재라면, 생산하지 못하는 순간 그 가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이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라면, 사회는 어떤 조건에서도 그를 배제할 수 없다.
AI 시대는 이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든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더 노골적이고 더 급박해진다. 디스토피아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치 판단을 회피할 때 만들어진다.
따라서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필요 있는 인간’과 ‘필요 없는 인간’으로 나뉘는 세계로 갈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이 인격적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근본적 원칙을 재정의할 것인지는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런 논의가 우리를 불편한 경계까지 밀어붙였다면, 이제는 그 경계를 넘어설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사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쓸모 있는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해체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근본 전제다.
먼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인간을 생산하는 존재로만 규정하는 순간, 인간의 가치는 외부 기준, 곧 효율, 성과, 경쟁력에 종속된다. 이러한 잣대로는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반대로 인간을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본다면, 곧 존재 자체가 가치의 근원이라면, 생산성은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난다. 이 두 관점의 차이는 단순한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를 갈라놓는 분기점이다.
사실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더 난해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생존과 번식이 답이겠지만, 인간은 그 이상의 의미를 요구하는 존재다. 인간은 의미를 구성하고, 관계를 맺고, 고통과 기쁨을 해석하며 살아간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의미를 생산하는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의미가 반드시 경제적 생산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그리고 사회적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도 관계를 형성하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로 존재한다. 그들의 삶은 생산성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쓸모’라는 개념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쓸모는 언제나 특정한 체계 안에서만 정의된다. 시장 경제에서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쓸모가 되고, 군사 체계에서는 전투력이 쓸모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환원할 수 없다면, 어떤 단일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판정하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규범적 판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만약 사회가 단순히 효율적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면, ‘불필요한 인간’을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모든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장치로 본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는 강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회를 ‘경쟁의 장’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오히려 이 관점이 점점 더 설득력을 잃는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이상 인간의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경쟁을 기준으로 한 사회 구조 자체가 정당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 대신 사회는 ‘공존의 장’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공존의 장에서는 누가 더 유용한가 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잘못 설정된 질문일 수 있다. 그 질문은 이미 인간의 가치를 외부 기준으로 평가하는 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왜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양한 존재가 공존할 때, 인간 사회는 더 풍부한 의미를 생성한다.
더 나아가, ‘비생산적인 존재’로 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인간 사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그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약자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인간성을 훼손하게 된다. 반대로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는 효율성에서는 손해를 볼지 몰라도, 인간다움이라는 더 근본적인 가치를 유지한다.
AI 시대는 이 선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기술이 인간의 역할을 대체할수록,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때 인간 사회의 목표는 더 이상 생산의 극대화가 아니라, 의미와 존엄의 보장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역설적이다. ‘쓸모 있는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인간을 축소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도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이며, 바로 그 환원 불가능성 자체가 인간의 본질이다.
미래의 인간 사회는 하나의 근본적인 선택 앞에 서 있다. 인간을 계속해서 측정하고 평가하고 선별하는 체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존을 설계하는 체계로 나아갈 것인가? 전자가 효율을 약속한다면, 후자는 존엄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선택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윤리 원칙을 적용하기엔 어쩐지 이미 늦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틀리면 정말 다행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