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형제의 싸움'을 말릴 수 있을까?

인식의 전환만이 인간 존재의 질적 전환을 가져온다

by Francis Lee

앞의 글에서 다룬 '형제 싸움' 이야기에서 예수가 등장하면 형제 싸움에 대한 사유는 질적인, 심하게 말하면 양자역학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왜 자신과 닮은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지를 분석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해석의 전환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예수의 사유는 여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는 단순히 “견딤”이나 “공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제의 잘못을 일흔일곱 번 용서하고 더 나아가 그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윤리적 권고의 수준을 넘어, 인간 이해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예수의 핵심 명제는 단순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이 말은 흔히 도덕적 이상으로 이해되지만, 그 구조를 면밀히 보면 전혀 다른 급진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웃”은 낯선 타자가 아니라, 나와 동일한 조건 속에 있는 존재, 다시 말해 나와 닮은 존재, 곧 형제이다. 모든 이웃이 나의 형제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 몸과 같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배려나 공감을 넘어, 동일시를 요구한다. 타자를 나와 구별된 존재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연장으로 이해하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인간이 자신을 규정하는 전통적인 방식인 차이를 통해 자신을 세우는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와 타자를 구분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보해 왔다. 그러나 예수는 그 경계를 해체한다. 나와 타자를 나누는 선을 유지한 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려 한다.


이 점에서 예수의 사유는 카인과 아벨의 서사에 대한 근본적인 반전으로 읽을 수 있다. 카인이 아벨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 했다면, 예수는 타자를 살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완성된다고 본다. 존재의 논리가 “배제”에서 “연결”로 바뀌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행위의 원리”로 제시한다. 그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은 더 이상 선택적 호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며, 관계를 구성하는 근본 원리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근본적인 역설이 등장한다.


이 역설은 우리가 앞서 분석한 “동일성의 위협” 문제를 정면으로 해소한다. 나와 닮은 존재가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를 희소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가 살아남으면 다른 하나는 밀려나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수의 논리에서는 존재가 경쟁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 오히려 확장된다. 내가 타자를 살릴 때, 나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갈등은 단순한 윤리적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이해에서 발생한 근본적인 오류다. 그동안 우리는 형제를 경쟁자로 해석했기 때문에 싸웠고, 그 결과 서로를 파괴했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권유한 대로 형제를 “나의 존재를 확장시키는 또 다른 나”로 이해한다면,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때 형제성은 더 이상 위험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연대의 가능성이 된다. 나와 가장 닮은 존재이기에, 나는 그를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를 위해 가장 근본적인 선택인 자기희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 속에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사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인간의 역사, 특히 형제간의 갈등으로 가득 찬 역사 앞에서, 이 명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요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도덕규범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선언으로 읽힌다.


결국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카인의 논리인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방식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논리, 곧 타자를 살림으로써 나 자신을 확장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단순히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동일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동일성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형제간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신화는 처음으로 끝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마고 데이'(imago dei), 곧 인간이 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유로 수렴된다. 이 개념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왜 서로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틀을 제공한다.


예수의 급진적 요청인 타자를 자신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주장은 이마고 데이의 논리 위에서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타자가 단지 나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면, 자기희생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타자 안에 나와 동일한 근원을 가진 어떤 것이, 더 나아가 신의 형상이 현존한다면, 타자를 대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닮음”의 의미가 재정의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서 닮음이 경쟁을 촉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마고 데이의 관점에서는 닮음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한 근원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는 타자와 닮았기 때문에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그 닮음을 통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곧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때 타자의 얼굴은 더 이상 경쟁자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룩한 징표가 된다. 내가 타자를 바라볼 때, 나는 단지 또 다른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 비쳐진 일종의 신의 현현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윤리의 기초를 완전히 바꾼다. 타자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약하기 때문도, 사회적 계약 때문도 아니라, 그 안에 신적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형제 개념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형제란 단순히 같은 부모를 둔 존재가 아니라, 같은 형상, 곧 신의 형상을 공유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해 신을 간접적으로 만난다. 우리가 신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경배하듯이, 타자 역시 그러한 태도로 대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때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재해석된다. 그것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함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에 가깝다. 타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나와 경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신성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외심은 폭력적 충동을 억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치가 된다.


결국, 인간이 동일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길은 단순히 심리적 훈련이나 사회적 제도의 개선에만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변형에 있다. 내가 타자 안에서 나 자신을 보고, 동시에 그 너머의 신적 근원을 본다면, 동일성은 더 이상 경쟁의 원인이 아니라 계시의 통로가 된다.


이러한 사유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인간은 왜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그 닮음을 단지 “위협적인 유사성”으로만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닮음을 “신적 근원의 공유”로 읽을 수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서 예수가 권유한 대로 인식을 전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나온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 인식의 전환이 오면 형제는 더 이상 제거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는 단지 인간의 얼굴만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 함께 비쳐진다. 바로 그 인식 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동일성을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로, 경쟁이 아니라 관계로, 그리고 파괴가 아니라 자기 초월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예수가 가르친 방식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면 더 이상 이란 전쟁도 형제간의 다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예수가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치고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일갈한 지 2000년이 흘렀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의 호소는 허공에 퍼지고 메아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더 고민해 보아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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