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에서도 반복되는 인간 원형의 치유 방법은 있다.
현재 벌어지는 이란 전쟁만이 아니라 그동안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 이후 중동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져온 갈등을 단순히 지정학적 충돌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 깊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이 각각 아랍과 유대 민족으로 이어졌다는 서사는 이 갈등을 “형제간의 전쟁”이라는 상징적 틀 속에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넘어,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고전적인 방식인 신화적 사고를 잘 드러낸다.
성경은 이 구조를 매우 원초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 다름 아닌 형제 사이에서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잠재된 질투, 인정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 신과 같은 절대 권력자의 선택을 받는 것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아벨은 비참하게 죽었고 카인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신의 가호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형제 갈등”의 서사는 성경만의 독특한 전유물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반복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쌍둥이로 태어나 도시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다가, 결국 형제 살해하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여기서도 중요한 점은 갈등의 대상이 ‘타자’가 아니라 쌍둥이 형제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점이다.
이러한 패턴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오시리스가 자신의 형제 세트에게 살해당한다.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는 같은 가문에 속한 판다바와 카우라바 형제들이 대규모 전쟁을 벌인다. 중국 고전에서도 권력 승계를 둘러싼 형제간 살육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요즘 유행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서술하는 수양대군도 조카만이 아니라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였다. 크게는 이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명에서 동일한 서사와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 근본적인 폭력성의 구조를 반영하는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자 인간 본성일 가능성이 크다. 형제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경쟁자다. 동일한 자원을 공유하고, 동일한 사랑을 갈망하며, 동일한 정체성을 놓고 경쟁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갈등은 낯선 타자보다 훨씬 더 격렬해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형제의 싸움은 단순한 가족 문제를 넘어 인간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은유로 기능한다.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갈등을 완화시키기보다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갈등의 대상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거의 동일한 존재”일 때, 오히려 미묘한 차이가 더 큰 위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결국 형제간의 전쟁이라는 신화적 구조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선택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동일성 속에서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이 충돌할 때, 가장 가까운 관계인 피를 나눈 형제가 모인 가족조차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변한다.
오늘날 우리가 중동 지역에서 목격하는 갈등 역시,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라 이러한 깊은 인간적 구조 위에 놓여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실 단순하다. 우리 인류는 이 오래된 서사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넘어설 것인가?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도대체 형제는 왜 싸우는가?'라는 질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인간은 왜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가?'일 것이다.
앞서 살펴본 신화적 서사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은, 인간이 단순히 “타자”와 갈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 가장 유사한 존재와 더 깊고 치열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근원적인 정체성의 구조를 건드린다. 사회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할 때,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는 경계를 설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너무 멀리 떨어진 타자일 경우에는 이 경계 설정이 쉽다는 데 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차이를 인정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나와 거의 동일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전통을 공유하며, 비슷한 욕망과 목표를 지닌 존재는 더 이상 저 멀리 존재하는 그래서 내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편안한 타자”가 아니다. 그는 나의 직접적인 거울이 된다. 나는 그 거울을 매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거울은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나 자신의 숨은 모습까지 비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쟁이 발생한다. 동일성은 연대를 낳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타성을 더욱 강화한다. 같은 것을 원하는 두 존재는 결국 같은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인정, 권력, 사랑, 자원과 같은 것은 제한되어 있다는 전제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같은 부모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고, 같은 유산을 두고 다투며, 같은 정체성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이른바 “자기 동일성의 위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와 너무 비슷한 존재는 나의 고유성을 위협한다. 나라는 존재가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믿는 근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미묘한 차이를 과장하고, 때로는 그것을 절대적인 차이로 전환한다. 종교적 분열, 이념적 갈등, 심지어 학문적 논쟁에서도 가장 치열한 싸움은 어처구니없게도 종종 “거의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요즘 한국의 정치판을 보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분열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심리적 기제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심연에 놓인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신화 속 형제 이야기에서 이미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신의 인정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인식 때문이다.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제거한 요인도, 도시의 정당한 창건자가 누구인가라는 “단 하나의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이처럼 갈등은 차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일성 속에서 더 쉽게 발생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다. 인간은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유사성을 필요로 한다. 완전히 다른 존재에게서 받는 인정은 의미가 약하다. 나와 비슷한 존재, 나와 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존재에게서 인정받을 때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인정은 더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한다. 하나는 “같아지고자 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두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장 위험한 관계로 변한다.
따라서 “왜 인간은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견디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심리적 기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위협으로 느낀다. 우리는 닮기를 원하지만, 닮았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인 것이다.
이 통찰을 오늘의 세계에 적용해 보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단순히 차이를 줄이거나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동일성 속의 차이”를 어떻게 견딜 것인지에 있다. 다시 말해서 나와 비슷한 존재가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리고 동일성 속에서도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형제간의 전쟁을 끝내는 길은, 더 이상 서로를 형제로 보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라는 사실이 경쟁의 이유가 아니라 공존의 근거가 되도록 재해석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보다 실천적인 차원으로 넘어간다. 형제라는 사실이 왜 갈등의 근거가 아니라 공존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가장 근본적인 전환은 “동일성의 해석 방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인간은 동일성을 “대체 가능성”으로 이해해 왔다. 나와 같은 존재는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 즉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동일성을 “공유된 기원”으로 재해석하면, 전혀 다른 윤리적 지평이 열린다.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것은 경쟁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서사를 다시 읽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선택과 배제의 이야기로만 소비될 때 갈등의 근거가 되지만, 동일한 약속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때 공존의 가능성을 품는다. 즉, “누가 선택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왜 둘 다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인정 욕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인정이 희소하다고 전제한다. 누군가가 인정받으면 다른 누군가는 배제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이다. 인정이 제로섬이 아니라는 인식, 다시 말해 타인의 인정이 나의 박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을 때, 형제는 경쟁자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일종의 증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나와 유사한 존재가 나를 인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차이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를 견디는 능력”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일성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차이를 극대화하는 전략은 모두 한계를 가진다. 중요한 것은 동일성 속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를 파괴하지 않고 유지하는 능력이다. 이는 단순한 관용을 넘어선다. 관용은 때로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태도가 되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견뎌야 한다.
다음으로 신화의 해석을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단순한 도덕 교훈으로 읽는 대신, “왜 인정이 한쪽으로 집중되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 역시 “누가 창건자인가?”라는 배타적 질문이 아니라, “왜 공동 창건의 서사가 불가능했는가?”라는 문제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은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조직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제라는 개념을 혈연의 범주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형제는 단지 같은 부모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조건 속에 놓인 존재들, 동일한 불안과 욕망을 공유하는 존재들로 확장될 수 있다. 이때 형제성은 경쟁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윤리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존재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근본적인 해결의 출발점은 외부의 제도나 구조 이전에,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적 서사나 인간 심리에서는 “같음”을 위협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만약 “같음”을 관계의 기반으로, 그리고 상호 인정의 조건으로 다시 이해할 수 있다면, 형제간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서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럴 때 형제는 더 이상 서로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존재를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