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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이지?

예수 정신이 없는 기독교 교회는 적그리스도다.

by Francis Lee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독교가 느리지만 지속적인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예외였다. 기독교는 미국의 국교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미국에서조차도 기독교의 종말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장 중요한 표지가 바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다.

최근 GRID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사실 미국 기독교인의 숫자는 실질적으로 1990년대부터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참조: https://www.grid.news/story/politics/2022/12/17/a-mass-exodus-from-christianity-is-underway-in-america-heres-why/?utm_source=Pew+Research+Center&utm_campaign=1c80275b08-EMAIL_CAMPAIGN_2022_12_21_04_20&utm_medium=email&utm_term=0_-1c80275b08-%5BLIST_EMAIL_ID%5D)



<Pew Research Center>의 예상으로는 2070년이 되면 미국의 기독교인은 소수에 속하게 된다. 교회를 떠나는 기독교 신자의 주류는 30대 이하에 속한다. 이른바 MZ세대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무늬만 신자인 경우가 36%에 달한다. 35%는 아예 종교가 없고 신앙이 있는 이는 29%에 불과하다. 그런데 뜻밖에 Z세대는 40%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아직 부모의 영향을 받는 연령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세는 탈기독교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미국인들이 교회를 점차 더 멀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이제야 탈기독교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나는가? 그런 질문은 이제 무의미하다고 불리번트(Stephen Bullivant)가 말한다. 불리번트는 최근 발간한 <Nonverts The Making of Ex-Christian America>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탈출한 이들에 관한 매우 풍부한 자료를 정리하였다. 제목에 나오는 nonverts는 말장난으로 만든 신조어다. converts, 곧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라는 단어를 패러디해서, 기독교를 떠난 이를 nonverts라고 부른 것이다. 아마 유행어가 될 것 같다. 불리번트는 지금 해야 할 질문은 지금 미국인들이 교회를 버리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진작 교회를 떠나지 않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역질문을 한다.

기독교 교회를 떠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불리번트는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먼저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서 미국의 기독교 신자 수가 감소하는 거시적 원인을 찾는다. 그것은 냉전, 9·11 사태, 그리고 인터넷이다.

불리번트는 미국의 냉전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냉전과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곧 유럽에서는 냉전에 기독교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기독교 미국' 대 '무신론적 공산주의', 곧 소련의 대립의 프레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사실 공산화되기 이전에 러시아 제국은 기독교국가였으니 그들의 신앙을 의심하는 일은 논리적 모순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종교 활동을 금지한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이 기독교의 참된 보루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에서 미국의 기독교까지 동원한 것이다. 물론 정치가 종교를 이용한 것도 있지만 기독교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련을 악마화한 것이 더 크다. 그래서 '천사 기독교 국가 미국'과 '악마 무신론 국가 소련'의 대립 구도를 세워 무지몽매한 기독교 신자들을 속인 것이다. 그것이 미국 기독교다. 그러나 정작 미국 기독교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는 그런 이분법적 도식으로 국민을 속이는 일을 벌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는 지성인들이 앞장서서 무신론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무신론자를 사회적 일탈자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공산주의에 심취해도 종교적 정체성을 묻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신앙이 흔들리거나 무신론자가 될 경우 미국 사회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었다. 1950년대 초반 ‘빨갱이’ 증오를 선동하는 매카시즘이 미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번지던 시절에는 아예 기독교를 벗어나는 일은 반역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마치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이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달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정치계와 종교계가 실적 이익을 위하여 기독교를 이처럼 심각하게 왜곡한 역사는 매우 심각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런 미국에서 수입된 한국 기독교는 그마저도 더욱 조악한 짝퉁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저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예수 믿는 일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입된 '미제' 기독교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그래서 툭하면 시청 앞으로 몰려간 기독교 신자들이 뜬금없이 미국 국기를 예수의 깃발처럼 휘둘러 대고 '빨갱이' 타령만 하는 것이다. 예수를 배우라고 했더니 1950년대의 미국의 매카시즘적 기독교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조차 사라진 기독교의 ‘빨갱이’ 증오 현상에 더해 미국 찬양 사달이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만 벌어지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한 참 벗어난 한국의 이른바 ‘개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친미와 ‘빨갱이 반대’의 도식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미국의 하늘을 배회하던 매카시즘의 유령이 21세기 한국 하늘을 배회하고 있는 이 현상을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냉전이 끝날 무렵 태어난 미국의 신세대는 이제 그런 냉전 이데올로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를 죄의식 없이 그리고 반역자가 된다는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기독교는 오늘도 여전히 계속 '빨갱이' 타령이다. 어찌해야 하나?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을 바라보고 한 기도를 따라 할 뿐이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누가 23,34)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보자.


9·11 사태는 미국의 탈기독교 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러한 대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자비로운 신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을 그토록 사랑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 인간의 손으로 죽임을 당해도 용서하는 신이 왜 인간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교도인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손에 말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신의 침묵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신뢰에 손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인간을 돕지 못하는 신을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렵 한국에서도 선풍을 일으킨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유명인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도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틈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사유로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탈기독교' 추세를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보게 만드는 이유를 제공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일, 무신론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천벌을 받을 일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와는 달리 전지전능하고 무한히 자비로운 존재이고 인간의 바로 그런 신의 자녀들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용서하고 참아주고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적 결론이 내려졌다.

인터넷은 어떤가? 기술적으로 인터넷은 1950년대에 이미 군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90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일하던 버너스-리(Sir Timothy John Berners-Lee)가 HTTP를 기반으로 하는 World Wide Web(WWW)을 고안하여 비전문가도 인터넷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나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미국의 텍사스주의 지독히 기독교적인 전통에 찌든 깡촌 구석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만나는 사람도 다 기독교 신자고 동네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며 가장 번잡한 사교 모임 장소인 교회가 우주의 중심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런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문자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신천지를 열어주었다. 그런 고립무원의 동네에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세상이 전부라고 알던 사람이라도 인터넷을 통해 전혀 세상과 접속이 가능해진 것이다. 우주에는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그리고 그 이름을 다 셀 수조차 없는 많은 종교가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독교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저 여러 종교와 사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인간의 지혜로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 무한한 자유를 다름 아닌 기독교의 신이 인간에게 주었으니 말이다.


이런 거시적인 변화만으로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구식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태도가 신자들의 답답증을 악화시켰다. 일부 교회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예배 형식을 ‘개선’ 해 보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 근원적으로 교회가 배타적인 진리의 수호자라는 근본주의적 정신을 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유대교적인 철저한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기독교 교회를 지겨워하는 분위기에 대하여 교회는 오히려 세상이 더욱 타락하고 말세가 가까웠다는 식의 아전인수적인 해석을 내놓고 안주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을 증오한다. 그 세상에서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 세상을 증오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교회를 사람들이 신뢰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러는 사이에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 현상이 교회 밖으로 드러나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욱 악화되었다. 교회는 여성 사제직, 동성애자 혼인, 낙태와 피임과 같은 이슈에 교회가 ‘양보’하면 신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이슈는 교회에 대한 혐오의 근본 원인이 아니다. 근본 원인은 바로 교회 자체의 타락이다. 교회가 세속적인 세상을 성스럽게 바꾸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교회가 세속적인 타락을 하고 있다. 교회는 더 이상 예수가 말한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수익을 내기 위해 운영되는 기업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교회도 신자 수에 따라 영세 교회, 중소 교회, 대형 교회로 나뉜다. 그리고 대형 교회 목사가 되면 최고급 자동차를 굴리고 으리으리한 사택에서 살고 수백 억의 돈을 만지고 수십 억의 판공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계의 '거물'과 교제하는 것이다. 예수가 단 한 번도 권유한 적이 없고, 스스로 행한 적도 없는 짓을 기독교의 목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진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까지 한다.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사제의 아동에 대한 성폭행과 추행, 목사의 외도와 돈과 관련된 추문은 이제는 전쟁과 연예인 가십과 나란히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그저 그런 소식이 되어 버렸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일부' 목사나 신부가 타락한 사실만이 충격은 아니었다. 그런 사제나 목사의 성추행, 외도, 금전을 둘러싼 추문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하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신부나 목사도 사람이기에 유혹에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죄인을 감싸고도는 제도 교회 권위자들의 부도덕이 사회적으로 주는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다. 예수가 가르친 것과는 전혀 다른 짓을 하니 말이다. 분명히 예수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라고 했는데 아마 기독교 교회는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가 아직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당당하게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고도 반성을 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도 안 하고 피해 보상에도 달팽이보다 더 더딜 수 있겠는가?

사실 기독교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절정에 이르러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신이 내린 벌이라고 여긴 신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개혁이 가톨릭 교회를 살려주었다. 원래 내부적 혼란 수습에 최선의 방책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오합지졸이 되어 분열될뻔한 가톨릭 교회를 마르틴 루터가 더욱 공고한 조직으로 만들어 주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질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지 이미 500년이 넘은 교회가 이제 21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내부적 붕괴를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탈기독교 사회에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담보할 새로운 종교는 무엇이 될 것인가? 먼저 기독교가 개과천선하여 neo-Christianism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도 교회의 배타성과 자기 식구 챙기기의 관성이 이미 더 이상 수습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된 현실에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종교가 나타날 것인가? 그것도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다. 기독교에 맞서는 것이 뉴에이지 영성인데 결정적으로 조직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제로에 가깝다. 기껏해야 음모론으로 버티는 중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역사가 보여 준 대로 어떤 종교든 융성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을 지닌 정치 세력의 비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콘스탄티누스가 없었으면 기독교는 번성하지 못했다. 아쇼카가 없었으면 불교는 그저 그런 종교로 남았다. 당태종이 없었으면 대승불교는 바퀴를 제대로 굴려보지도 못했다. 진리가 아니라 정치권력이 종교를 키우는 것이 엄연한 진리다.


기독교의 교세가 줄어들고 있지만 특히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정치적 세력은 아직 막강하다. 그래서 예수가 설파하고 시작한 하늘나라를 추구하던 진짜 교회는 서서히 무너지겠지만, 껍질만 남은 근본주의 기독교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그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종교적 힘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의 기생 요소로서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참다운 정신을 버린 교회가 예수를 팔아먹는 것도 어느 한도에 머물고 말 것이다. 교회를 예수가 떠날 것이니 말이다. 사실 적그리스도는 교회 밖에 있지 않다.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 적그리스도가 마침내 본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신천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기독교를 가장한 단체가 자신을 교회라고 부르면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문자 그대로의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일 것이다.

신약 성경의 요한 1, 2서에 나온 대로 과거에 적그리스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적그리스도는 입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지만, 그의 행동과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자다. 현재 교회 안에는 그런 자들로 넘쳐 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인데 그런 자들은 교회는 장사와 사교 모임을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의 정화가 필요한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와 교황은 서로가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였다. 이제는 개신교 교회끼리도 서로를 적그리스도라고 한다. 맘에 안 들면 다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마치 한국 사회에서 극우 세력의 맘에 안 들면 다 ‘빨갱이’가 되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런데 그렇게 적그리스도가 넘치는 때가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세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넘친다는 그 적그리스도이니 말이다.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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