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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예수 저작권’이 기한 만료되나?

예수를 왜곡한 교회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by Francis Lee
bible-1948778_1920.jpg 예수의 교회의 사유물이 아니다


현재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예수가 꿈꾸던 에클레시아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서양의 교회는 예수 공동체의 참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예수가 재림하여 지금의 교회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분명히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는 무슨 잘못을 하고 있고 예수가 꿈꾼 에클레시아는 어떤 모습을 가진 것인가?

예수가 말한 공동체는 문자 그대로 종말론적인 집단이었다. 곧 다가올 종말, 곧 하늘나라의 도래에 대비하여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는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거룩함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가족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이었다. 곧 혈연관계를 부인하고 예수가 말하는 신의 뜻을 따라 모두가 형제자매로 살아야 했다. 이는 당시 강력한 가부장제를 기초로 한 유대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주장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쓴 마태복음조차도 가부장제의 상징인 남성 중심의 족보가 가장 먼저 나오는 판이니, 경건한 유대교인들이 어땠을지는 상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예수는 교회 건물을 따로 지어 그곳에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예배를 볼 것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니 건축 헌금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리고 예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별도의 직업에 종사한 적도 없다. 문자 그대로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갔다. 틈틈이 아는 사람이나 거리에서 만난 사람의 집에서 만찬을 즐기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는 가정을 꾸리거나 사회적 성취를 위하여 노력한 적도 없다. 돈을 모으는 것은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대가 모은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하는 모습을 보고 당장 나가서 그 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저 자기가 한 말을 믿고 따라야 할 것만 강조하였다. 그가 주장한 것은 오로지 하나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런데 사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먼저 한 말이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그런데 <신약성경>이 쓰인 언어인 고대 그리스로 보면 뜻이 약간 달라진다.


Μετανοεῖτε, ἤγγικεν γὰρ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마태 4,17)


원래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회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라는 도덕적인 반성의 의미가 담긴 단어로 번역하여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개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유대교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은 반성을 의미하고 반성은 신의 명령에서 벗어난 일을 회개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예수의 외침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당연히 예수가 말하는 신이 통치하는 세상을 말한다.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의 신인 야훼가 지명한, 곧 머리에 기름을 부은 다윗과 같은 통치자가 나타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식민지라는 치욕적인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신의 ‘통치’(βασιλεία)는 정치적인 단위인 가시적인 왕국이 아니라 신의 힘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신의 힘은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예수는 종교 권력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종교 권력을 지닌 사제단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다. 그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바로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신성모독의 죄를 지은 것이다. 당연히 예수는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민중에게 인기 있는 예수에 대한 종교적 판결을 내려 돌로 쳐 죽일 경우 반발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신성모독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몰아 로마제국의 적으로 죽이고자 한 것이다. 예수가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예수가 죽은 다음에 일어났다. 예수가 잡혀갈 때 이미 다 도망갔던 자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다시 모여 예수를 기억하는 모임을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난 뒤에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래서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에 세운 교회들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뿌리가 된 것이다.


이 교회가 바로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예수를 평생 만나본 적이 없고 오로지 환시로만 예수를 ‘체험’한 바울이 예수의 열두 제자에 버금가는 사도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예수 가르침의 ‘해석’을 독점한 것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에 맞서보려고 했지만 이미 그 세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조직과 돈에서 예루살렘을 능가하는 바울은 이제 기독교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 교회 자체가 로마의 정치 세력에 의해 무너져 버렸으나 말하자면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 되었다. 이제 세상은 바울의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바울의 교회는 예수의 ‘정통’ 교회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적통자의 권위를 지닌 예수의 교회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망해버리고 나니 예수에게 직접 배운 적도 없고 예수를 직접 본 일조차 없는 바울이 예수의 이름을 걸고 교회를 세워나갔어도 누구도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것도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기독교 역사의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적자 교회가 아니라 서자 교회가 예수의 ‘저작권’을 가져가 버리는 일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 벌어졌다. 예수의 평등주의와 보편적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종말론적인 세계관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교회 안에서는 매우 엄격한 계급이 등장했고 부동산과 토지를 중심으로 한 재산 증식과 관리가 교회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 세금보다 더 지독한 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기부로 교회만이 아니라 수도원도 매우 부유한 조직이 되었다. 특히 교회 제도에서 밀려난 이들이 세운 수도원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1세기 초에 문자 그대로 벌떼같이 수도원들이 난립하고 서로 경쟁에 나섰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기피와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나라, 곧 피안의 세계를 이 세상에 구현하려는 예수의 구상을 다름 아닌 교회가 망가뜨린 것이다. 오히려 피안의 세계의 모형이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가장 차안의 세계적인 모습을 구현하였다. 이를 보고 참다못한 민중의 지지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결국 개신교도 가톨릭의 패러다임을 답습하고 말았다. 건물과 땅의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정치권력의 의지에 따라 가톨릭의 교회와 땅 그리고 재산이 개신교로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말로는 오직 예수지만, 실제로는 오직 부동산이었다. 그 교회 건물과 땅 그리고 재산이 없으면 조직과 인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말씀은 없어도 버티지만 재산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교회라는 구조적인 모순을 지닌 일종의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수도원 운동이 한창 붐이 일던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1098~1179)가 민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남자 수도원에 더부살이를 벗어나 독립하려고 하자 수도원장이 목숨을 걸고 말렸다. 명분은 교회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힐데가르트의 명성을 보고 그 수도원으로 몰려든 사람과 돈이 문제였다. 힐데가르트가 새 수도원을 열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갈 수밖에. 실제로 힐데가르트가 독립하자 기존의 남자 수도원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 그 수도원은 폐허로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가 세운 수도원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다. 믿음보다 부동산과 돈 그리고 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힐데가르트가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제 기독교 교회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부동산과 재산이 건재한 동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수의 정신을 떠난 교회가 얼마나 더 예수를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예상으로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예수 운동이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으니 말이다. 2000년 가까이 예수를 ‘무자격’으로 독점하여 저작권을 침해하면서 권세를 누렸으면 이제 물러날 만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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