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에 대한 인간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 한다.
최근에 영국 요크 교구 대주교이자 성공회 서열 2위인 스티븐 코트렐 대주교는 성공회 시노드에서 한 연설에서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Pater noster qui es in caelis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인 암시를 주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지구상의 아버지에 대한 파괴적이고 학대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과 삶에 대한 가부장적 지배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성공회 보수파의 거두인 크리스 수든은 바로 반박을 했다. 예수 자신이 직접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하라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그에 맞서 성공회의 여자 주교인 크리스티나 리스는 거대 담론적인 논지를 펼친다. 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정말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완벽하고 정확하게 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신이 믿는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런데 지난 2월, 영국 성공회는 신이 여전히 ‘남성인 그’(He)로 불려야 하는지를 조사하겠다고 선언한 바가 있다. 사실 성공회의 사제들은 성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이에 대한 성공회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은 고대부터 신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성경에 하나님을 언급하고 묘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항상 우리의 예배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에서도 감지된다. 2022년 4월부터 독일 가톨릭 청년회(KJG)는 신을 의미하는 단어인 Gott에 +를 더해 Gott+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청년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신이 턱수염을 기른 늙은 백인으로 여기는 것은 신학적으로 너무 편협한 것으로 많은 젊은이가 신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논쟁이 유럽에서 요즘 벌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30년 전에도 비슷한 주장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런 논쟁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이다. 아직 아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신은 남자인가? 한국의 ‘개독교’에게는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불경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의 원조인 유럽의 기독교는 이 문제가 불경죄에 해당되지 않는 건전한 이성적 토론의 주제가 된다. 수준이 다르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는 영원히 개독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소수의 목사나 신부의 돈벌이로 전락한 상황에서 건전한 토론은 처음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다.
신은 왜 남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구할 수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담론은 전개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화두를 던져본다.
기독교 신의 성별은 역사를 통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세계 최대 종교인 기독교는 20세기에 들어와 신의 본질과 성별에 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언어는 신을 지칭하기 위해 주로 남성적인 용어를 사용해 왔지만, 현대의 논의는 이러한 성별화된 묘사에 대한 재평가를 촉진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여전히 신을 지칭할 때 ‘아버지’라는 남성적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신의 속성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남성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유대-기독교의 경전인 성경 본문에서 유래했다. 이 접근법은 중동과 유럽이라는 독특한 지역적, 역사적 배경과 가부장제라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제도에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다른 제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의 산물이다. 가부장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한 1만 년 전부터 나타난 데 비하여 주요 종교는 모두 2000~3000년 전에 출현한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가부장 제도가 확고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인류의 모든 제도적 종교가 출현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을 지칭하는 남성 언어의 전통적인 사용은 구체적으로 성경 본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예외 없이 남성적인 은유와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되며, 특히 신의 권위, 힘, 지도력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신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은 모두 남성의 손으로 제작되었다.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남자가 남자의 시각으로 쓴 것이다.
이러한 남성적 서술자들은 성서가 쓰인 시기에 널리 퍼진 문화적, 사회적 규범에 영향을 받았다. 고대 근동 사회는 남성 인물들이 권력과 권위의 위치를 차지하는 가부장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신을 묘사하기 위해 남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등장한 사회적 프레임의 반영이었다.
또한, 신을 지칭하는 남성적 용어의 사용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믿음인 강생 신앙의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아버지 신이 여자 마리아의 몸을 통해 자기 외아들을 지상으로 보낸 것이라는 도식은 신과 관련하여 남성적인 언어를 널리 사용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은 역사적, 문화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 전체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여전히 살아있고 진화하는 종교로 신에 대한 현대적 논의는 신을 남녀로 구분하여 묘사하는 것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했다.
많은 전통주의자는 신을 묘사하는데 남성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 용어가 권위, 보호, 제공자와 같은 주로 남성성에 기인하는 특성들을 강조한다. 그래서 남성적인 용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성한 본성과 속성을 전달하는 방법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가부장적 권력 구조를 영구화하고 종교 기관과 사회 전반의 성 불평등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비평가들은 신을 위해 남성적인 언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여성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고 주장하며, 신이 남자라는 이데올로기를 고착화하여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주의를 강화한다고 여긴다. 신의 성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신에게 남성적 용어를 사용하여 가부장적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종교 기관은 물론 사회 안에서 성적 불평등을 영구화한다는 것이다. 곧 신에 관하여 남성적 용어와 이미지를 일관되게 사용하여 특히 종교적 맥락 안에서 여성을 그 핵심에서 소외하고 배제하는 경향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신을 남성성과만 연관시킴으로써 신의 본질은 남성 중심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하여 여성의 경험과 관점의 가치와 중요성을 떨어뜨린다. 결국 종교공동체 안에서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불평등한 권력 역학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남성적 언어의 배타적 사용은 결국 신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방해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방해하게 된다. 신의 여성성을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경험과 관계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종교적 담론 안으로 수용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현재 기독교의 쇠락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접근법을 옹호하는 이들은 신을 언급할 때 성 중립적이거나 좀 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곧 여성이자 동시에 남성의 형태로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확인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적 맥락에서 가부장적 구조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그런 구조를 해체하여 성평등과 포괄성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가부장 제도는 농경문화에서나 기능하던 구시대적인 프레임인데도 불구하고 남성 전체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 남성의 권력 강화에만 이바지하는 결과를 여전히 낳고 있다.
이러한 비판이 결코 신의 성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무시하거나 무효로 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신이 남성이 아니듯이 여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성별에 대한 계몽된 이해는 오히려 신자들의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을 고려하여 포괄적인 신학적 담론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자들은 오늘도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포괄적인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는 대안적 언어와 이미지를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현대 신학자와 기독교 공동체들은 하나님의 성별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신의 포용적 성격을 강조하며 성 중립적 용어의 사용을 강조하거나, 전통적인 남성 용어와 함께 여성적 이미지를 통합한 포용적 용어의 사용을 권장한다.
성 중립적인 용어의 사용은 단어에 성이 있는 서양 언어에서는 비교적 쉬운 접근법이지만 한국어처럼 언어에 성의 개념이 전혀 없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남성 또는 여성 성별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용어의 사용에서 시작할 수는 있다. 한국어의 경우 ‘아버지’보다는 ‘그분’으로 처리할 수 있다. 신자들이 성 중립적 언어를 채택하게 되면 신의 본성이 인간 차원의 성적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더 포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종교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의 성별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이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탐구된 또 다른 방법은 여성적 이미지의 통합이다. 이것은 신의 양육, 연민, 생명을 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어머니" 또는 "그녀"와 같은 여성적 은유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인들은 여성적 용어를 통합함으로써 역사적 불균형을 상쇄하고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의 성별에 대한 관점을 넓히려는 이러한 노력은 다시 말하지만, 신에 관한 전통적인 남성 언어의 중요성을 대체하거나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부족했던 것을 보완하고 더 풍부하게 하기 만들고 신에 대한 더 섬세하고 포괄적인 묘사를 허용하기 위한 것이다. 남성적인 이미지와 여성적인 이미지를 통합함으로써, 신자들이 신에 기인한 인간의 모든 경험과 특징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적 접근법이 성공회와 같은 일부 기독교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아직은 저항이 훨씬 크다. 그러나 결국 시대정신이 여성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저항은 시간이 갈수록 약화될 것이다.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안에서 신의 본질에서 여성적 속성과 경험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신성한 여성의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양육, 동정심, 창조성과 같은 전통적인 여성성과 관련된 자질들을 수용함으로써 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균형 있게 하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서 등장한 ‘신성한 여성’의 개념은 신의 본질 안에서 여성적 속성과 경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새로운 관점이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양육, 동정심, 창조성과 같은 전통적으로 여성성과 관련된 자질들을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 균형 잡히고 풍부해진다고 주장한다.
신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 담론과 실천 내에서 성 편견과 불균형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경직된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해체할 기회를 제공하며, 인간의 모든 경험을 수용하는 신에 대한 보다 평등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촉진한다.
기독교는 단일 종교가 아니며, 하나님의 성별에 대한 해석은 종파, 문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일부 기독교 교파들은 예배와 전례에서 성을 포함하는 언어를 채택하지만, 다른 교파들은 더 전통적인 접근방식을 유지한다.
기독교 신의 성별을 둘러싼 논란은 신앙 내에서 진행 중인 신학적, 문화적 대화를 반영한다. 전통적인 언어와 해석이 신을 묘사하기 위해 남성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현대의 논의는 이러한 성별화된 묘사에 대한 재평가를 촉진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인간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다양한 해석과 실천에 참여하고 있다. 신을 성별을 초월한 존재로 이해하든, 신성한 여성성의 관점을 수용하든, 성을 포함한 언어를 옹호하든, 이러한 대화는 종교적 담론에서 신성과 성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여할 것이다. 결국 신도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근원적인 목적은 바로 인간의 자발적 동의와 협력이다. 그러한 인간이 21세기에 들어서서 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고자 신의 성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놀라운 존재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논의는 결국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