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근본주의자야말로 적그리스도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의 극우 주교를 파면시켰다는 소식이 들린다.(링크: https://edition.cnn.com/2023/11/11/us/pope-francis-joseph-strickland-texas/index.html?dicbo=v2-r1lrpk9) 미국 텍사스주의 타일러 교구 교구장이었던 스트릭랜드(Joseph E. Strickland) 주교에 대한 교황청 특사의 조사 결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타일러의 파면을 결정하고 통보한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동안 노골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들어 온 자다. 스트릭랜드는 소셜 미디어에서 공공연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치를 비난하고 2020년 공개 인터뷰에서는 아예 프란치스코 교황에서 ‘나를 잘라라!’라는 요구까지 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막상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9월 9일에 그에게 사표를 쓸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여기는 가톨릭교회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한 마디로 ‘미친’ 주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가톨릭교회에서 기술적으로 주교는 교황과 맞먹는 지위에 있는 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황은 모든 주교만이 아니라 추기경을 통치하는 황제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낱 미국의 작은 교구의 주인인 스트릭랜드가 그런 교황에게 대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교황이 그를 직접 파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주교까지 된 자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극우 세력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코로나 사태 때 백신 음모론을 퍼뜨렸고, 바이든 대통령이 낙태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를 ‘악마 같은 대통령’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섰다. 게다가 그는 다음과 같은 가짜뉴스를 퍼뜨리기도 했다.
“미국가톨릭주교회의와 가족계획연맹이 임신 9개월 된 모든 태아의 낙태를 통한 무고한 이의 학살을 지지하는 바이든-해리스 행정부를 한 목소리로 지지하여 이 나라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졌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낙태를 금지하기도 하고 허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주에서도 임신 9개월의 태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스트릭랜드가 이른바 pro-life, 곧 과격한 낙태 반대론자로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가짜뉴스까지 퍼뜨리는 짓을 벌인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낙태만이 아니라 동성애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가 동성애자와 낙태한 여자를 단죄한 적이 있나? 정답은 ‘없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 문제에 이 문제에 대해 지난 2019년 발표된 다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성애자는 가족 구성원이 될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가족 구성원이 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버려져서도 비참해져서도 안 됩니다.”
또한 낙태에 찬성하는 가톨릭 신자 정치가들을 파문해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2021년 9월 15일 슬로바키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했다.
“목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난하고 돌아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 그들은 하느님의 친밀하고, 연민을 느끼고, 부드러운 스타일을 따르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 이런 하나님의 방식을 행할 줄 모르는 목자는 목자에 속하지 않은 많은 일에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흔히 목자에 비유된다. 그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돌아다닌다. 그만큼 버려진 이, 소외된 이, 무시당하는 이를 위해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고 가르침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자기들이 소수이면서 낙태와 동성애를 선두에 나서서 반대하며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신이 시킨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실천한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는 동성애자와 낙태한 여자를 단죄하지 않았다. 극우 기독교 신자들은 낙태와 동성애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죄라고 일갈하며 그에 관련된 이들을 욕하고 더 나아가 죽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낙태 시술 의사를 공공연히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도 기독교 신자는 그것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해한다. 분명히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음에도 태아의 살인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 정작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낙태한 여자와 낙태 시술한 의사, 그리고 심지어 낙태를 찬성하는 이들을 적으로 여기며 죽이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살인은 죄가 아니고 남이 하는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이 궤변인 것을 이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 유명한 인지부조화의 질병에 걸린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과격분자가 되었을까?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의 독특한 구조를 알아야 한다. 현재 낙태를 가장 많이 하는 계층과 인종은 가난한 흑인이다. 백인들도 낙태하지만, 숫자가 상대적으로 흑인에 비해 적다. 그래서 극우 기독교 신자들은 예배를 드려도 자기들끼리만 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예수가 백인이고 백인만을 위한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가 한국으로 건너왔고,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는 예수가 미국 백인이고 성경은 처음부터 영어로 예수가 직접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근대에 들어와서 사실 예수의 인종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예수가 백은 흑인 황인 가운데 어느 인종인지를 따지는 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예수는 당연히 유대인이기에 중동 아랍계열, 더 정확히는 셈족에 속하는 존재다. 그런데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 가운데는 여전히 예수가 백인이고, 백인이 아니어도 백인만을 그것도 건전한 백인 말하자면 백인 남자와 백인 여자끼리 결혼한 일부일처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기독교 신자가 참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이들이 많다. 이들은 ‘당연히’ 강력한 인종차별주의자 계열에 속하고, 처음에는 흑인과 황인 등 피부색으로 차별을 하고 나서더니 그들이 주장하는 기독교 가치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성애자와 낙태 옹호자까지 포함되게 된 것이다. 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기본적으로 증오와 혐오, 배척,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으므로 자기들이 믿는 것에 어긋나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이런 계통에 속하는 자들은 무식한 이들만 있지 않다. 위의 스트릭랜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조직, 더 나아가 사회에서 상당한 엘리트층에 속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경건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걸핏하면 예수와 신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들의 교주인 예수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는 분명히 친구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주변에 가장 작은 이, 곧 가장 보잘것없고, 힘없고, 남들의 멸시받는 이들에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 더 나아가 신을 위해 하는 선행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회의 약자만 괴롭힌다. 동성애자와 낙태한 여자는 한 사회에서 극도로 취약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다. 그들은 특이한 상황에 놓이고 대부분 차별을 받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무기력한 상황에 부닥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가장 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가장 만만한 먹잇감을 발견한 것이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정작 예수가 경멸한 권력자들 돈 많은 자들 앞에서는 오히려 굽실대기 일쑤다. 예수가 가장 아끼는 병든 자. 소외된 자. 무기력한 자, 어린 자에게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무시하고 공격하기 일쑤다. 그러면서 일요일에는 교회나 성당에 나가 하느님 하나님 주님 예수님을 외친다. 미친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자기가 미쳤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다.
다행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답답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특히 로마 교황청의 실질적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 극보수 추기경들이 사사건건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치에 제동을 건다. 게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 너무 노쇠해서 더 이상 힘차게 개혁을 추진할 힘도 없어졌다. 참으로 아쉬운 상황이다. 그러는 와중에 기독교 성직자들, 목사나 신부나 가리지 않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일삼거나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해 온 것이 드러나면서 교회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다.
어제 독일 뉴스에는 에드문트 드릴 링거 신부의 추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동네에서 존경받는 신부로 살다가 82살에 죽었다. 그런데 그의 조카가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동포르노 자료가 발견되었다. 드릴링거는 특히 흑인 아동과 관련된 포르노 사진을 많이 남겼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아프리카 선교를 자주 다녔다. 그러나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능했다. 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일 경찰과 검찰은 피해자 탐문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 교회에 다반사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조사 기관을 통해 계속 드러나고 있다. 성직자 성폭행 피해자 가운데 많은 이는 자살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교회는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
예수가 말했다. 죄인들은 남의 눈에 있는 검불을 뭐라 하면서 정작 자기 눈에 들어 있는 기둥은 보지 못한다고. 지금 교회와 신자들이 그 모양이다. 도대체 예수의 가르침은 어디로 배웠는지 모를 일이다. 자기 죄는 전혀 모르고 그저 제일 만만한 동성애자와 낙태한 여자만 집단 린치를 가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예수가 재림한다면 이런 자칭 경건한 기독교 신자들을 보고 뭐라고 할까? 정말 궁금하다. 물론 기독교 신자는 그런 식으로 타락한 성직자나 신자는 극히 일부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프랑스만 해도 성추행을 한 성직자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도 수십만 명에 이르고 독일도 지금까지 계속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는 일요일 교회에 가서 자기와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빌 뿐, 예수가 말한 가장 작은 형제에 대한 기도는 거의 드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자란다. 예수를 믿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이런 이기주의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바로 적그리스도다. 말세에 나타난다는 그 적그리스도 말이다. 그저 예수가 재림하여 그런 적그리스도를 처단해 주기만 기다릴 뿐이다. 교회는 참다운 예수 정신으로 기도하는 곳인데 적그리스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예수가 성전에서 외친 말이 다시 들려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린 교회를 정화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신자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배워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오면 예수가 말한 대로 주변의 가장 작은 이, 소외받은 이, 힘없는 이, 병든 이에게서 예수와 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오면 성직자가 더 이상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것이다. 그날이 언제나 오려나? 아니 오기나 할까? 예수 앞에 동성애자와 낙태한 여자가 있다면, 예수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대할까? "이 죄인아! 나가 죽어라!" 그러면서 그들을 두들겨 패고 내쫓을까? 아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불쌍한 내 형제자매야. 내게 와서 위안과 위로를 받기 바란다. 내가 너희를 안아주고 싶다." 이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