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Jan 24. 2022

김건희와 윤석열의 ‘무속 사달’에 대한 개신교의 침묵

한국 교회 안에 정녕 예수는 더 이상 없다는 말인가?


김건희의 ‘7시간 51분 통화’ 내용에서 드러난 윤석열과 김건희의 ‘무속’이 언론에서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미신’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이 땅에 들어왔던 개신교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보수 개신교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한국교회언론회>는 윤석열과 김건희의 무속에 대하여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정부 비판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자칭 한국의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도 윤석열과 김건희의 무속 사달에 대하여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정통 교단’에서 이단으로 단죄한 통일교 재단과 연계된 언론사인 <세계일보>가 오히려 윤석열의 무속 사달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순복음교회 재단과 관련된 신문사인 <국민일보>가 그나마 윤석열의 무속에 대한 우려는 나타냈다. 순복음교회는 한 때 그 잘난 ‘정통 교단’에서 이단 시비가 붙었던 교단이다. 도대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정통임을 자랑하는 장로교나 감리교 그리고 성결교는 어디로 숨었는가?


이럴 때 늘 하게 되는 질문이 있다. 만약 예수가 지금 여기의 한국에 와 있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까?


뻔한 답이 나올 법한 질문이니 구태여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요점은 말하고 싶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네게 주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 문장 앞에 나온 ‘먹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이다. 물론 그의 나라는 하늘나라이다. 그런데 의는 무엇인가? 물론 정의로운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정의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 앞에서 떳떳한 것이다. 신 앞에서 떳떳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신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을 마음과 생명과 의지를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한국의 개신교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더 골몰해 보인다. 특히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후 보여준 개신교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물론 기독교 계통의 신천지가 보여준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른바 정통 교단의 ‘주일예배 사수’를 위한 투쟁은 과연 이 사회 안에서의 기독교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라는 화두를 던졌다. 사실 기독교는 김대중 정부 이후 이른바 좌파 정권이 등장할 때마다 반정부 투쟁의 선두에 서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개독교’로 만들어 왔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여 결정적으로 이기적인 면모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그 결과 많은 학술 연구와 통계 조사에서 나타난 대로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가? 이제는 그 어떤 비판을 받아도 오히려 당당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 그대로  가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예수가 말한 ‘그 나라와 의’보다는 이 지상에서의 권력과 세 과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호의호식하는 삶을 선호하겠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초현대식 건물을 짓고 수만 명의 신자들을 모아 세 과시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건물을 수백억 원에 사주지 않는다고 합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조금만 집단 이기주의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떼쟁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저 툭하면 삐지는 문제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개신교가 이제는 ‘미신’에 대해서조차 무덤덤하다. 물론 교리적으로 ‘미신’을 적그리스도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다. 왜? 호의호식에 무관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그 ‘빨갱이 때려잡기’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래서 이 사회에서 ‘좌빨’만 사라지게 한다면 청와대에서 풍수와 관상과 사주가 난무해도 아무 관심이 없게 된 모양이다. 이런 극단적인 집단 이기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었을 터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 예수를 떠올려 본다. 성전에서 화를 내고 채찍으로 제물을 파는 이들과 환전꾼들을 몰아내던 그 예수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외쳤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그렇다 현재 개신교 교회는 예수가 극도로 혐오한 ‘장사’를 하고 있다. 개신교 집단의 이익이 보장된다면 그 어떤 ‘악’과도 거래를 틀 모양새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자들 가운데 누구도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교회에서 장사꾼을 몰아낼 생각을 안 한다. 왜 그럴까? 교회 안에 더 이상 예수가 없기 때문 아닌가? 도대체 예수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제 무늬만 성전이 되어버린 교회 건물 안에서 제물을 거래하는 장사꾼과 환전상만이 아니라 풍수와 관상과 사주를 보는 이들도 뻔질나게 다니겠지? 어차피 예수가 떠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니 말이다.  


김건희의 점괘에는 이미 이런 개신교의 모습이 나온 것 아닐까? 구약을 모두 외운다는 김건희 답게 이미 기독교의 약점을 다 파악한 ‘도사’다운 ‘영빨’을 발휘해가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영빨에 나라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하나?


 מרנא תא


주님 어서 오소서!


אָמֵן














매거진의 이전글 가톨릭 교회에도 양성 평등의 바람이 불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