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인류의 종말보다 한반도의 종말이 더 빠를 것 같다.
한국 사회가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라서 차라리 <신약성경>의 이른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말하는 ‘신천지’가 어서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북한은 언제든 전쟁을 벌일 태세가 되었다며 으르렁대고 있고 남한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려 원수가 된 지 오래인 데다가 이데올로기, 남녀, 노소, 빈부, 도시와 농촌, 수도권과 지방으로 갈라져 서로 증오하며 저주를 퍼붓고 있다. 어느 한 군데가 고장이 났으면 수리할 맘이 생길 법도 하다. 그러나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여 파국이 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차라리 종말이 와서 한국 사회가 reset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안 될지라는 생각조차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몇 사람의 생각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특히 서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종말론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실제로 서기 1000년에 이른바 천년왕국론으로 유럽 전체가 종말을 준비하는 광기에 휩싸인 적도 있다. 그러나 종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때에 오지 않는다고 <성경> 자체가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계통의 신흥 종교가 종말론과 신천지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 종말과 신천지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이른바 정통 기독교 교리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기독교보다는 과학계가 지구의 종말을 이미 ‘과학적’으로 예언해 놓았고 인류의 종말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구가 45억 년을 버텨오는 동안 이미 지구상에 살던 여러 생명체가 종말을 맞이했다. 지구상에 존재한 생명체의 영고성쇠의 역사를 거울삼아 이제 인류가 언젠가 그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교적 ‘과학적’인 예언이 매우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구나 인류가 특히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구 자원을 남용하면서 자본주의적인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프레임을 수립한 이후 인류가 스스로 자기 명을 재촉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인류의 종말은 생각보다 더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지구는 인류가 아무리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해도 몇 억 년 후면 인류가 더 이상 생존하기 힘든 행성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사실 이는 원래 지구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구가 처음 형성되던 수십억 년 전 지표면은 문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섭씨 수천 도의 뜨거운 지표면에서 용암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그 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 이전에 인류가 다른 행성을 찾아 이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과학자나 기업가들이 많지만,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문자 그대로 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확실한 종말이 온다고 해도 지금 당장 여기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치 우주의 크기가 인간의 사유 능력을 초월하여 오히려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현재 지구가 현재 1,670km/h의 속도로 24시간 주기의 자전, 107,000km/h의 속도로 365일 주기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은 781,000km/s의 속도로 2억 5,000만 년 주기로 공전 중이다. 음속이 섭씨 20도 기준으로 1,235km/h이니 이 모든 수치가 인간을 매우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누구도 물리적 속도로 현기증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인간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한때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서양의 지성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신이 자기와 닮은 모습으로 창조한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은 신의 위임을 받아 자연을 지배할 권리가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우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자연과학적 우주관과 인간관이 대세가 되고 나서부터는 인간이 ‘별 볼일’ 없는, 더 나아가 지구라는 생태계에는 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급진적 환경운동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인류가 멸망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자본주의적인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든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한 인류의 자멸도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는 ‘과학적’ 인식이 보편적 진리가 되었다. 지구의 지하자원을 이용하여 화석 연료로 사용하고 상품을 생산하여 소비하고 결국 지구를 오염시키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형태는 이제 지속 가능하지 않은 프레임이 되었다는 데 모든 과학자만이 아니라 정치가와 ‘동료 시민’도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는 좀처럼 지금까지의 소비 행태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과 인도와 같은 이른바 ‘신흥 경제 대국’은 서양이 세워 놓은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패러다임을 토착화하여 경제·사회를 유지하는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서양의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인도, 그리고 한국과 같은 경제 발전국이 지구의 오염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상품 소비에 한 번 맛을 들인 인류가 이러한 추세를 거스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환경 파괴만이 아니라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과 전염병이다. 그리고 그 못지않은 임팩트가 있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경제 파탄이다.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위한 무한한 경제 발전이라는 허상의 덫에 걸린 자본주의는 반드시 붕괴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전도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인류 전체의 파국적 운명에 더해 한반도는 추가적인 파국의 요소들이 있기에 더욱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이데올로기와 남녀노소의 갈등에 따른 사회적 분열로 자멸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경제 상황은 2007년 IMF 사태 때나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욱 나쁜 지표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남한과 북한은 더 이상 ‘한 민족’이 아니라 ‘주적’ 관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이재명 대표에 대한 정치 암살이 시도되었음에도 그 일은 뒷전에 밀린 채 진영 싸움에만 사회 전체가 몰두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여러 정황을 볼 때 현재 한국 사회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병리 현상은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고 나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IMF 사태 때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체에 나타나는 병리 현상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병이 드러나기 전에 잠복기가 있듯이 사회적 병리 현상에도 잠복기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 이전에 한국 사회가 이러한 파괴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이 된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 정권 때 고속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사회적 모순이 발생했다는 분석은 많은 학자가 하고 있다. 특히 경제 발전에 못 따라가는 정치로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사회적 분노가 마치 지표 밑에서 끓고 있는 마그마처럼 그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정희 쿠데타 이전의 한국 사회에 지진을 일으키는 ‘응력’이 없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사회는 김구 여운형 암살과 같은 정치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승만 독재 정권 시절에도 그의 독재에 맞선 국민의 저항으로 사회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좌우의 극한 대립은 이른바 ‘동족상잔’의 전형을 보여준 것으로 세계사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일제 강점기는 어떠했나? 엘리트 계층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패거리의 집단 이기주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했고 이에 맞선 민중의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저항으로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던 조선 말기의 상황이 한반도 역사상 처음인 공식적인 식민지국이라는 참상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좋았나?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서 역성혁명에 성공했고,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 시대에도 수많은 백성이 기근으로 굶어 죽었다. 세종의 아버지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친인척과 세력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편할 리가 없었다. 세종 이후 다시 일어난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 중심의 권력 다툼으로 나라에는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었다. 이후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91), 을사사화(1545)로 지배 엘리트가 죽임을 당했고, 삼포왜란(1510),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을유왜란(1905)으로 지속적으로 나라가 흔들렸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조약 사달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내란도 자주 일어났다. 이괄, 이몽학, 이시애, 이인좌, 이징옥, 이필재, 정여립, 조사,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고, 인조와 중종도 반정으로 등극했다. 여기에 더해 조선 말기에 일어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혁명은 한반도에서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조선 말기에도 많은 백성은 이제 옛 세상의 종말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더 이상 핍박받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론은 서양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서양에서는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여기 지금의 세상이 지겨운 착취가 사라진 살만한 곳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저 가렴주구 하는 권력자가 조선의 관리에서 일본의 지배자로 바뀐 것뿐이었다. 고통은 지속되었다.
인간은 통상적으로 현재의 삶이 고달프면 종말을 꿈꾼다.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든 개인의 종말이든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그러나 결국 궁극적으로 그 종말은 능동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형태의 것이 되고 만다. 세상의 변화는 내가 작동할 수 없고 나의 죽음조차도 나 스스로 마칠 수 없다. 자살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마감하고 싶은 삶은 고달픈 삶이지만 막상 내가 중단시키는 것은 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자살한다고 해도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자의 힘으로 또는 자연의 힘으로 인간과 지구의 존재가 무화된다고 해도 내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나와 무관한 밖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뿐이다. 그래서 내 세상의 종말은 결국 오지 않는다. 다만 나의 생명만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근원적 모순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자기 삶에서 소외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내 삶이지만 절대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그래서 종말을 꿈꾸고 막상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도 인간은 운명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또 다른 세상 곧 신천지가 도래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신천지는 그 이전의 세상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물질계의 프레임 안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말이다. 신천지는 <신약성경>의 ‘요한묵시록’ 21장 1~8절에 나오는 개념이다. 그 구절을 인용해 본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이어서 “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신 다음,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원어인 그리스어로 새 하늘 새 땅이 나우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굳이 그리스어를 인용하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교파마다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논쟁이 벌어질 때 원문 대조하면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데 최고의 방법이다. 한국에서는 이만희가 성경의 이 부분을 나름대로 해석한 이른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라는 종교 단체를 세워 ‘성공’을 거둔 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정통’ 기독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다 밝혀졌지만, 종교를 빙자한 정치세력화에 성공하여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세상 살기 힘들고 말세에 대한 불안감을 지닌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한 종교의 악용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지금은 신흥 종교가 집중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른바 정통 기독교 교단도 매우 오래전부터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신자들을 협박하여 돈과 서비스를 착취해 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종교적 착취에 가장 흔히 이용되어 온 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요한묵시록’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이 책을 빼버릴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너무 황당무계하고 신의 말씀이 아니라 점쟁이들이나 할 법한 난삽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냥 두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19세기 이후 성경 연구를 통해 밝혀진 대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오류가 많고 중언부언하는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본문들을 짜깁기 한 부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종교가 도그마화 되면서 마치 성경에 담긴 내용에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신성한 책으로 떠받드는 오류를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각 나라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뿐 아니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까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타가 부지기수로 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 오타가 난 책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맹신으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위에 인용한 ‘신천지’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천지는 이미 유대교의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는 유대인들이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그들의 성전도 무너진 채 외국에서 노예나 포로로 살다가 다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와 그들에게는 신천지인 곳에서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해야 했던 역사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 지식 없이 ‘요한묵시록’을 멋대로 해석하면서 예수의 재림이 있은 다음 이 지구가 새로운 땅이 되고 새로운 하늘 아래 살게 된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자기 멋대로의 생각을 투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부활과 영생이 개념이 없는데 그런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 기독교다.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이 땅에 다시 오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천년 왕국을 세우리라고 믿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일곱 촛대, 엄청난 창녀, 괴물, 그리고 666이나 144,000명이라는 숫자는 모두 유대교의 상징적 비유인데도 그것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맞추어 멋대로 해석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라는 비유도 유대교의 전형적인 모티브다. 그런데 이것을 많은 신흥 종교에서는 교주와 신자의 관계로 해석하는 한심한 일까지 벌어진다.
신천지가 분명히 유대교에서 말하는 되찾은 이스라엘 왕국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많은 기독교에서는 마치 이것이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오독하고 신자를 기만하여 돈을 뺏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짓을 자행해 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많은 신흥 종교가 무지몽매한 ‘동료 시민’을 사기술로 유인하여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어차피 자기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살아가는 데 자신이 없는 이들에게 내세를 약속하고 구원을 약속하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교주에게 충성을 다할수록 구원이 더 가깝다는 데 일단 가스라이팅을 당한 상태에서는 그런 사기술을 식별할 능력이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
지구의 종말은 분명히 온다. 다만 수억 년, 또는 수십 억 년 후에 벌어지게 될 일이다.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지구의 종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은 두려워할 만하다. 특히 그 인류의 종말이 6,400년 전 유카탄반도에 떨어졌던 유성이 다시 지구에 오기 전에 전염병, 전쟁, 경제 파탄으로 올 것이니 말이다.
내일 인류의 종말이 온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신천지를 찾아야 하겠지만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행성이 4.4광년 떨어진 알파 켄타우루스다. 그곳에 도착하려면 몇 세대가 생존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어야 한다. 아직은 공상 과학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테슬라의 주인인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거주지를 마련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중인데 이것이 그나마 가장 실현 가능한 미래다. 화성의 자전 주기가 24시간 37분으로 지구와 비슷하고 단단한 지각도 있고 얼음도 있는 것이 분명하니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대기의 95%가 이산화탄소이고 산소는 0.146%로 거의 없는 상황이니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구의 대기에 비해 100분의 1밖에 안 되니 화성에 정착해도 당장 살기 어렵다. 그래서 테라포밍을 이야기하지만, 어느 세월에 그 긴 과정을 완성하겠는가?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도 산소와 물도 있고 최저 기온도 화성보다 높으니, 여기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너무 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구 환경에 최적화된 존재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서 신천지를 만난다고 해도 지구에서 적응했던 만큼 그곳에서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류의 종말과 신천지에 대한 고민을 한참 하다 보면 결국 이 지구에서 살 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지금 당장 세상이 망할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 차 있고, 차를 몰고 나가보면 자연환경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저녁에 돌아와 침대에 들어 온수 보일러를 켜고 누우면 바로 여기가 천국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상 천국을 두고 뭐 하러 개고생 하러 화성, 유로파, 게다가 알파 켄타우루스를 찾아가겠나?
그러나 과학자들, 특히 서양의 환경파괴론과 종말론에 ‘꽂힌’ 정치가와 사회운동가, 나아가 종교인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몰락할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 서양의 깬 ‘동료 시민’의 촉구가 아니라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이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환경 파괴와 이산화탄소 발생량 증가. 중국에서 말아오는 미세먼지, 중국에서 왔다는 코로나바이러스, 중국에서 새로 나타났다는 폐렴, 중국에서 생겼다는 페스트. 중국의 뒷배를 믿고 ‘덤비는’ 북한, 그런 북한과 맞짱 뜨겠다는 윤석열 정권의 국방장관, 연신 가래침을 뱉어 대면서 ‘디올’ 가방을 넙죽 받는 김여사, ‘김건희 특검법’이 ‘도이치 특검법’이라고 우기는 한동훈, 아내는 신성불가침이라며 ‘격노’해서 특검법을 단칼에 내치는 대통령, 민주당을 떠나면서 먹던 우물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는 이낙연과 이상민, 그리고 정치에 불만이 있다고 이재명 대표의 목을 칼로 그어대는 수구 세력, 사회가 경상도와 전라도, 진보와 보수, 남자와 여자, 꼰대와 MZ세대, 부자와 빈자로 갈가리 분열되어 서로 죽자고 멱살잡이하고...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가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망상 아닐까? 인류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한반도의 종말이 가장 먼저 올 것만 같아서 우울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