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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06. 2024

기독교 교회를 떠나니 비로소 보이는 예수 공동체?

참다운 예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 교회가 타락의 극치에 이르는 세상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성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주식회사처럼 운영된다.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고 계급을 만들고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없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언행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기독교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라고 권유한 내용은 단 한 줄도 안 나온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는 이 모양 이 꼴이다.    

 

사실 영어로 church, 독일어로 Kirche라고 표기하고 한글로 ‘교회’라고 번역한 용어는 성경에 안 나온다. 성경에는 에클레시아, 신자공동체라는 말만 나온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어 원문을 보자.     


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여기에 나오는 τὴν ἐκκλησίαν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의 모임을 의미하는 ἐκκλησία의 4격, 목적격 명사다. 특정한 건물, 특정한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가 지금 우리가 보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 당시 아마 건축 헌금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목수였으니 집을 직접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를 구상했다면 성직자, 장로, 집사, 권사의 계급을 다 만들어 그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확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이 대형 건물을 외상으로 짓고 그 융자금을 신자들에게 떠맡기며 건축 헌금을 강요할까? 그리고 주일만이 아니라 심방을 하면서도 돈을 요구할까? 그리고 예수가 분명히 자기를 따르려면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성직자는 왜 신부, 목사이라고 불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성당에서 평신도가 ‘김 신부!’ 이렇게 불러보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아마 예수님을 ‘예수!’로 불렀을 때보다 더 경을 칠 일이 될 것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평신도가 ‘어이 김 목사!’ 이리 부르면 지옥에 갈 대죄나 지은 것처럼 야단법석을 피울 것이다. 분명히 예수는 신을 믿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형제자매라고 주장했고 예수를 따르려면 그렇게 평등한 보편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권유했는데 왜 유독 한국 기독교에서 특히 이 모양일까? 성경을 그리 잘 읽는다면서 도대체 예수가 말한 것을 어디로 이해한 것일까?     


문제는 그런 계급의식을 신자들 스스로 불문율이나 되는 듯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부나 목사가 나서기도 전에 장로, 집사, 권사가 나서서 평신도의 품행을 단속하고 윽박지른다. 마치 신부나 목사를 숭배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심의 발로로 여기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신자들끼리 패가 갈려서 싸운다. 심하면 목사와 대립하여 교회 건물 사용권을 두고 법적 싸움까지 벌인다. 그리고 목사나 신부가 돈을 빼돌리고 성추행해도 돈을 빼앗긴 신자 성추행을 당한 신자를 탓한다. 이것이 과연 예수의 이름을 걸고 모인 공동체의 모습일까? 문제는 이런 문제가 한두 교회나 성당에서 벌어지는 예외적인 사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많은 교회와 성당이 오늘날 이 모양이다. 목사나 신부가 더 이상 성직이 아니라 편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에 과연 이 모양 이 꼴의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가 전파한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불성실하게 성경을 읽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 그 종교의 경전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성경은 무턱대고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 책이 아니다. 그 책에 너무 거룩한 내용이,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진리가 담겨서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과정이 매우 난잡했다. 누가 언제 썼는지 불확실한 여러 내용을 모아서 우리가 오늘날 흔히 성경으로 부르는 책을 가톨릭교회가 집대성한 것은 4세기에 들어서다. 가톨릭이 싫다고 떠난 개신교도 몇 권을 제외하고는 이 성경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쓰거나 중복으로 번역한 내용이 복잡하게 모은 것이기에 어느 것이 진본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런 문제를 정리한 것이 로마 황제와 가톨릭교회의 주교들이다. 결국 사람이 성경을 정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이 성령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신앙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약 46권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하는 성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1646년 트리엔트 공의회다. 물론 개신교는 가톨릭교회가 맘에 안 들어서 이 가운데 구약에서 7권을 빼버리고 총 66권을 성경으로 결정해 버렸다. 무슨 권한으로? 물론 성령의 인도로 그랬단다. 그렇다면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모두 성령의 인도로 성경을 정한 것인데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경 번역본이 매우 다르다. 특히 용어에서는 죽자고 싸우면서 자기만의 표현을 고집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 용어가 통일되었는데 기독교의 식민지인 한국만 이 모양이다. 중국과 일본도 이 정도는 아닌데 한국만 이리 패거리주의가 교회 안에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과연 예수가 이런 한국의 기독교를 보면 뭐라고 할까? 그런 지경에서도 여전히 우리 목사님, 우리 교회, 우리 성도라고 난리 피운다. 그러면서 같은 예수 믿는 자들끼리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욕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를 믿는다고 큰소리친다.     


이런 모양의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여전히 교회에 나갈까? 당연히 사교모임을 할 마땅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비슷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수다 떨고 교제해야 스트레스가 해소될 일 아닌가? 믿음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고? 그런데 왜 기독교 교회를 일요일마다 열심히 나가는 사람에게서 신앙의 향기가 전혀 안 나는 것일까? 신앙의 향기가 나는 사람을 보면 예수의 언행이 체현되는 모습이 드러난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서는 정말로 그런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신자만이 아니라 내가 많이 만나본 목사나 신부 가운데에서도 신앙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신앙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데도 사교 모임을 위해 관성적으로 나가는 교회는 더 이상 에클레시아, 곧 신의 자녀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래서 참다운 예수 모임을 세울 고민을 하게 된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런 생각으로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세우고자 노력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조리 실패했다. 근본적으로 기성 교회에서 그런 모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비난이 이단이다. 어마어마한 대형 건물을 짓고 신부나 목사가 정점에 있는 교계제도를 세워서 계급을 만들고 수입과 지출을 회사 운영하듯이 관리하는 것만이 교회라고 선전하면서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다 이단으로 단죄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다. 그런 식으로 교회를 빠져나가서 신자공동체가 세워지면 그렇지 않아도 운영이 어려워지는 교회가 망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믿고 싶은데 교회에는 실망한 이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 하고 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그리스어 원본을 보자.     


Πάλι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ἐὰν δύο συμφωνήσωσιν ἐξ ὑμῶν ἐπὶ τῆς γῆς περὶ παντὸς πράγματος οὗ ἐὰν αἰτήσωνται, γενήσεται αὐτοῖς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τοῦ ἐν οὐρανοῖς. οὗ γάρ εἰσιν δύο ἢ τρεῖς συνηγμένοι εἰς τὸ ἐμὸν ὄνομα, ἐκεῖ εἰμι ἐν μέσῳ αὐτῶν.    

 

이 구절에서 모인다는 의미의 동사 συνάγω은 유대인의 시나고그, 곧 회당을 의미하는 συναγωγή와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시나고그는 종교 행사를 거행하는 성전과는 다른 기능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초토화하면서 성전도 파괴하자 시나고그가 유대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물론 시나고그는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베트 크네세트, 곧 모임의 집이라고 부르고 독일계 유대인인 아시케나지 같은 사람들은 독일어로 Schule, 곧 학교라고 불렀다.    

  

어찌 되었든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성전, 곧 오늘날의 교회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두 사람만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리면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된다. 예수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부부가 모여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은 마음으로 간구한다면 그것이 무형의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사는 집 자체가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진리가 이런데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 신자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칭하는 교회에 나간다. 거기에 가야만 기도가 되고 거기에 가야만 신이 있고 거기에 가야만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관성적이고 미신과도 같은 ‘신앙’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적 기독교 발전과 단절된 일종의 섬과 같아서 그런 세뇌가 훨씬 쉽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는 이 모양 이 꼴로 퇴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결국 누가 손해일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이제라도 예수가 말한 에클레시아를 세우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참다운 에수 교회를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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