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만 아이를 안 낳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선진국은 물론 중진국 여자도 아이를 안 낳는다. 현재 세계 합계출산율은 2.1이다. 인구가 겨우 겨우 느는 정도다. 기독교 정신이 가장 강하다는 미국조차 합계출산율이 1.62명에 불과하다. 도대체 왜 아이 낳는 것을 이토록 싫어하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미국 사람이 다음과 같이 했다.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는 미국 18~49세의 주요 이유/그래픽=임종철(출처: 머니투데이, https://v.daum.net/v/20241027083102986)
이런 가운데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상황이 조금도 개선될 여지가 안 보인다. 정부에서는 많은 세금을 써가면서 이른바 출산 장려책을 동원하는 모양새이지만 언감생심이다. 앞으로도 출산율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문제가 돈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출산과 양육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지닌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유래하는 행동이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적당한 나이 곧 성인이 되면 ‘짝짓기’를 하고 출산과 양육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교육을 받는다. 이는 묻고 따지고 자기고 할 것도 없는 하늘의 명령쯤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결혼을 하늘이 맺어주는 정도로 매우 높은 가치가 있는 일로 여긴다. 기독교 이전에 유대교에서는 혼인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자는 어른으로 대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성직자도 반드시 혼인을 해야만 한다. 성경에 나오는 랍비, 곧 스승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오로지 기혼 남자에게만 붙던 용어였다. 이런 전통에서 혼인, 그리고 출산과 양육은 신의 명령쯤으로 간주되어 왔다. 동양의 유교권에서도 혼인, 출산과 양육은 천명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혼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륜지대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전통 말고 사회적으로 혼인과 출산을 장려한 이유는 따로 있다. 동서양이 모두 농경사회이던 시절에는 자식이 곧 노동력이었다, 그리고 노동력은 생산성에 직결되었다. 많은 자식을 낳고 걸어 다닐 정도만 되면 바로 노동 시장, 곧 농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래서 많은 아이를 낳고 잘 길러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한 귀족과 왕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질 좋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혼인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애를 낳고 제대로 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서 ‘내 것’을 ‘네 것’보다 소중히 여기는 법이다. 그래서 ‘내 새끼’라는 사회적, 법적 도장을 찍어주면 그 자식에게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 도장을 국가가 찍어주면 출산과 양육을 할 의욕이 백성들의 마음에 더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굳이 많은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산업사회 초반기에 오로지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기계가 발달하면서 ‘힘센’ 남자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힘센 남자만이 아니라 아이와 여자도 얼마든지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계가 사람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시기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년 내내 땅에 붙어사는 삶에서 벗어나 일정 시간 노동을 하면서 임금을 받는 임금 노동자층이 출현하면서 여가를 즐기며 먹고살만한 계층이 출현한 때문이다. 이른바 프티 부르주아 계층, 곧 시민 계급이 탄생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물론 세계적으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미에는 노동집약적인 농경사회가 남아 있기에 그 지역의 인구도 같이 증가했다. 그래서 오늘날 8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양을 시작으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물론 ‘여자’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여자도 돈을 벌면서 경제적으로 ‘남자’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내 인생 내 맘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960년대에 범람하기 시작한 ‘피임약’의 도움으로 인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섹스와 출산을 성공적으로 분리할 수 있게 되어 문자 그대로 ‘여성 해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성 해방의 핵심은 섹스와 출산의 분리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 여성은 섹스를 하면 반드시 출산을 해야만 했다. 물론 피임을 잘하면 그런 ‘사태’를 피할 수 있었지만 사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피임약이 보급되기 전까지 여자는 섹스와 관련하여 그저 ‘애 낳는 기계’의 대접만을 받았었다. 그러나 돈과 피임약이 여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굳이 결혼하지 않고도 출산의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에 ‘프리섹스’가 유행한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왜 아이를 낳기는 싫은데 섹스는 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당연히 출산의 두려움 없는 섹스가 주는 쾌락 때문이다. 인간은 섹스를 ‘즐긴다.’ 동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한 현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동물은 종족 보존의 본능에 충실해서 섹스를 한다. 근본 목적이 종족 보존이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이 섹스를 종족보존의 본능에서 분리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짝짓기는 종족 보존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인간은 그것을 쾌락의 도구로 삼을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서울 하늘 아래 많은 모텔과 호텔에서 종족 보존과 전혀 무관한 쾌락을 위한 짝짓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족보존은 인간의 본능에서 점차 멀어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출산 기피 그리고 혼인 기피의 사회적 현상과 이어지게 된 것이고.
그런데도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뭐든지 ‘남 따라 하기 신드롬’이 심하기에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왜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 없이 나이가 차면 남이 하니까 떠밀려 결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혼인율이 줄어든다고 해도 여전히 예식장은 미어터진다. 이른바 ‘좋은 예식장’을 예약을 하려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일도 종종 있다. 다만 그렇게 혼인을 해도 그리고 짝짓기를 해도 출산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 한 대로 단순히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이 좀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대부분의 혼인을 앞둔 커플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행복은 미래의 후손의 것이 아니라 혼인 당사자인 ‘부부’의 것을 말한다. 그런데 출산과 양육의 굴레에 빠지는 순간 꿈꾸었던 ‘그 행복’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모든 돈과 에너지와 시간이 자녀에게 들어간다. 그것도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격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 자녀라는 것이 과거 농경사회에서처럼 10대 초반만 되어도 생산력이 되지도 못한다. 거의 30살이 되어야 부모를 돕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다. 부모가 30대에 출산하여 자녀를 30대에 독립시키면 부부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다 가버린다.
물론 우리의 조상이,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그렇게 20만 년 가까이 살아왔다. 태어나서 짝짓기가 가능한 나이가 되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짝짓기가 가능한 나이가 되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개미 쳇바퀴 돌 듯이 종족을 보존해 온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왜 결혼해야 하는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왜 양육의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게다가 종교와 정치적 지배자는 그런 고민을 불경하거나 심지어 신성모독인 것으로 여기도록 세뇌했으니 더욱 저항할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특히 여성 해방의 시대정신으로 아이를 낳고 기를 ‘의무’에서 해방된 여자가 출산과 양육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녀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된 것이다. 사실 출산과 양육은 고통이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말이다. 창세기에서 유대교의 신이자 기독교의 신인야훼는 자기의 말을 안 듣고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서 먹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의 동쪽으로 쫓아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장 15~19절)
그렇다. 하늘이 맺어준 혼인을 강조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조차 출산과 양육은 ‘저주’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은 저주나 다름없는 땅을 부쳐 먹는 형벌이다. 그런 혼인과 출산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많았겠지만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제재를 뛰어넘을 재간이 없었다. 사실 혼인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출산과 양육은 여자에게 더욱 힘든 일이다. 일단 출산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흔히 알려진 의학적 ‘고통 10단계’에서도 출산은 최악인 CRPS 그리고 화상 다음으로 강력한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다. 과거 엄마들이 애 낳을 때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과거에는 출산하다가 산모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산모가 병원에서 출산하기에 그런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고통은 여전하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 특히 한국 여자들은 무통 분만과 제왕절개를 선택한다. 그러나 출산 자체가 주는 고통도 크지만 출산 후에 육체적 고통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문자 그대로 여자의 몸은 ‘망가진다.’ 처녀 때의 몸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언론 매체에 노출되는 일부 연예인들이 출산 후에도 ‘그대로’라는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도 속병을 앓는 것은 일반 여성과 다르지 않다. 출산과 양육의 후유증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는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아이 낳고 힘들게 살다가 늙어 죽어가는 것이 어차피 인생 아닌가?
그런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여자들이 잘 알게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단순히 돈을 많이 준다고 아이를 더 낳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는 정부는 얼마나 한심한가? 출산 장려는 단순히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여성 해방이 일찍 이루어진 서양에서도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로 출산 장려 정책을 추구해 왔지만 그 어느 나라도 인구 증가는커녕 안정적인 인구 유지에 필요한 합계출산율 2.1을 기록한 나라는 없다. 모조리 1명 대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세계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오로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같은 ‘후진국’의 출산율이 높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출산율을 높이는 길은 사실 없다. 그러니 이대로 인구 감소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 예산을 아무리 많이 동원해도 소용이 없다. 남은 길은? 당연히 서양 모든 나라에서 실시하는 적극적인 이민 정책이다. 그러나 순혈주의에 물든 한국에서 이른바 ‘외노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 순혈주의가 강했던 독일조차 인구 감소를 ‘외노자’ 수용 정책으로 막고 있는 현실이 한국에서는 안 통한다. 독일 거주 인구는 약 8,400만 명이다. 그 가운데 2천만 명 정도가 외국 출신이다. 24%에 이른다. 한국은? 5천만 명 가운데 한국 거주 외국인은 250만 명에 불과하다. 5%도 안 된다. 2040년이 되어도 7%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한국의 인구 감소는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율 감소를 오로지 여자의 잘못으로만 몰아간다면 출산율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출산과 섹스를 분리하는 지혜, 돈을 벌어서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지혜, 종족 보존의 본능이 본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를 가진 ‘여자’를 설득하자면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가 가운데 그런 지혜를 가진 자가 누가 있을까? 단언하건대 한 명도 없어 보인다. 과거 조선시대에 여자를 우습게 본, 그리고 여자를 단순히 ‘아기 낳는 기계’로, 그리고 ‘그저 집안일이나 하는 종’으로 여겨온 업보를 이 시대가 이제 톡톡히 받는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다 시대정신인 것을. 그저 팔자소관으로 여겨야 할 모양이다. 아니면 이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에 필적한 ‘지혜’를 지닌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시대가 된 것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런 ‘남자’가 있을까? 그것도 여자 한 명 때문에 나라 전체가 뒤흔들리며 망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 널려 있는 검찰만이 아니라 정치계의 내로라하는 남자들이 모조리 '내시'가 된 현재 대한민국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