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Nov 30. 2024
왜 정우성은 알파치노가 될 수 없나?
이중인격적인 한국 페미의 희생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인 정우성이 스캔들에 흔들리고 있다. 원래 영어 스캔들은 그리스어 σκανδαλον에서 나온 말이다. 한글로는 추문으로 번역되지만 완전한 오역이다. 원래 뜻은 ‘걸림돌’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동사로 활용되면 ‘걸려 넘어지다’ 정도의 뜻이 되겠다. 뉴스를 보니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자가 정우성과 성관계를 가진 다음 정우성의 동의 없이 아이를 낳고는 그 아이를 빌미로 결혼 요구를 했단다. 정말로 정우성은 이 여자 때문에 걸려 넘어진 꼴이 되었다. 그런데 정우성이 강력히 반발하자 여자는 정우성의 사회적 명성에 누를 끼칠 것이 뻔한 데도 그 사실을 공개하는 행보를 펼쳤다. 기레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우성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기사를 계속 써대면서 정우성을 거의 파렴치범으로 몰아갈 기세다. 마치 자기 친자식을 버리는 못된 아버지나 되는 듯 말이다.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자칭 페미들은 정우성의 아이를 낳은 여자가 지고지순한 순수한 모성을 지닌 거룩한 여자이고 정우성은 자식을 낳은 여자를 아내로 여기지 않는 못된 한남이나 되는 듯 몰아대고 있다. 참으로 치졸하고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의 전후 맥락을 보니 35살이나 된 ‘나이 든’ 여자가 정우성이라는 대어를 낚아보려고 정우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정우성이 원하지 않는 출산을 하고 정우성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강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정우성에게 무책임한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덫 씌우기 위해 안달을 부리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임신과 출산은 혼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다시 말해서 부부가 될 결심을 한 남녀가 합의하에 이루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그런 의사가 없이 그저 통속적인 단어로 ‘엔조이’하는 사이로 만나 성관계를 맺으면서 고의든 실수든 임신을 한 것을 가지고 결혼하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참으로 괘씸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정우성의 아이를 낳은 여자는 엄마의 ‘모성애’를 무기로 삼는 모양새인데 이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술수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의 여러 연구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모성애가 있는 여자라면 아이를 결혼의 수단으로 삼을 리가 없다. 21세기 페미니즘이 범람하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무기’로 혼인을 강요하는 모양새는 어쩐지 낯설다.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자가 남자와 맞서 당당한 한 인격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치졸하게 아이를 무기로 남자에게 혼인을 강요하다니 너무 한심하다. 더구나 혼인을 약속하지도 않은 사이에서 쿨하게 만나 시나브로 성관계를 맺어 놓고 남자의 동의 없이 임신과 출산을 했다면 쿨하게 혼자 키울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회생활을 페미처럼 하고 개인의 삶은 조선시대의 케케 묶은 가장의 책임을 요구하는 모순을 저지르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기까지 하다. 당당한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여자라면 아이도 당당하게 혼자 기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싫다는 남자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리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군색하기 짝이 없는 작태다. 정우성의 아이를 정우성의 동의 없이 낳을 정도의 결심을 했다면 구걸하지 말고 싱글맘 워킹맘으로 살 각오도 했어야 마땅하다.
여기에서 정우성처럼 여자와 성관계를 맺고 자신의 동의 없이 자식을 낳은 여자 때문에 당황했던 미국의 유명한 배우 알파치노가 떠오른다. 알파치노는 83살에 득남했다. 정우성처럼 친자검사까지 했다. ‘임신시켰을’ 리가 없는 나이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아들은 낳은 누어 알팔라는 무려 50살 이상 어린 여자다. 알파치노는 평생 결혼한 적이 없다. 그래도 전에 사귀던 여자 2명 사이에 이미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아들을 하나 더 얻게 된 것이다. 엄마가 다른 자식이 4명이나 된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그 누구도 알파치노를 비난하지 않는다. 개인의 성생활 아닌가? ‘성적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여러 여자를 만나서 여러 아이를 낳는 것이 무슨 흉이 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법이 정하는 대로 자기 자식들의 양육비도 충실히 대주는데 말이다. 뉴스를 보니 막내아들은 직접 만나지 않고 영상으로만 교류한단다. 그리고 그만이다. 알파치노는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와 대비해서 한국은 정우성을 파렴치범으로 몰고 가려는 페미들의 노골적인 수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우성이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기레기들은 과거 정우성의 ‘여성 편력’까지 들먹이면서 정우성의 ‘추악한 면모’까지 드러내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기레기들이야 말로 추악함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나?
이번 정우성 사달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 사회는 윤리 도덕을 들먹인다. 특히 ‘남자’가 ‘걸려 넘어질’ 만한 일에 연루되면 ‘여자’들과 ‘기레기’들이 마치 기회를 잡은 양 난리 법석을 피운다. 그 잘난 윤리 도덕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정우성 사달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늘 피해자는 무조건 여자라는 공식을 내세운다. 말이 되는가? 서로 좋아서 성관계를 맺어 놓고는 그 책임을 왜 남자에게만 미루는가? 생활은 페미식으로 자기 멋대로 하고 책임은 조선 시대 식으로 남자에게 전가하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말이다. 이런 위선적 태도를 지니고 있기에 정우성은 알파치노가 되기 힘들겠다. 그래서 애처롭다. 한국 사회의, 특히 한국 사회의 페미들의 이중인격적인 위선이 역겹다. 그 그물에 걸려 넘어질 것 같아서 정우성이 불쌍하다. 잘 이겨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알파치노와 같은 위대한 배우로서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기기 바란다. 이런 스캔들에 넘어지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아깝다. 아직 미혼인 정우성이 여자를 100명 아니 1,000명 만나 ‘엔조이’를 하든 ‘원나잇’을 하든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를 비난하는 페미들이 경멸스럽기 짝이 없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서 문득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성서방네 처녀'가 생각난다. 장돌뱅이 허 생원과 눈이 맞아 물레방앗간에서 한 번 맺은 인연으로 생긴 동이를 잘 키워낸 그 '처녀'말이다. 요즘 페미는 100여 년 전의 그 '처녀'만도 못한 구식 사고방식을 지닌 것인가? 페미답게 자유롭게 '엔조이'하다가 정우성 같은 '괜찮은 놈' 하나 물어서 팔자 고칠 생각만 하고 있어 보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페미들은 몸만 자유로워졌을 뿐 정신은 조선 시대보다 더 구태의연하게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몸이 자유로워진 만큼 정신도 그런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본래의 페미니즘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남자에 기대어 팔자 고치려는 구식 '수작'을 이제 그만 부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