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분별과 욕심의 근원

by 은빛고래



언어는 오해의 근원이다.


- 생텍쥐페리 -





인간의 그릇된 분별심과 허망한 욕심을 내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분별과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DNA를 타고난 것인가? 자본과 미디어의 막강한 힘 앞에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이 완전히 세뇌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도덕경의 구절을 통해 조금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세계는 모두 언어로 구성되어있다.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모든 천지 만물을 언어로 개념화하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지어졌으 지어진 것은 그 특성에 해당하는 개념이 지어졌다. 태초의 시대를 지나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전까지 천지 만물에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 또한 언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의사소통을 위한 몸짓과 소리 그리고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감응과 조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류에게 현대인들과 같은 분별심과 헛된 욕망, 욕심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이름을 개념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 도덕경 1장 -


(도가도 비상도)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체의 그러한 마음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

한 쌍의 커플이 있다. 둘은 매일같이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말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 커플이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사랑해'라는 단어로 규정짓거나 표현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워하거나 미워하거나 존경하거나 증오하거나 편안하거나 질투하거나 설레거나 하는 마음이다. 하여 '사랑'은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기에 단어 하나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또한, 그러한 감정은 상대방과의 관계와 나의 마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복합적인 그 어떠한 감정을 '사랑'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주체의 지속하고 있는 감정의 실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명가명 비상명) 이름 지은 것에 개념을 붙이지만, 그 이름은 늘 붙여진 개념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누군가 사랑을 아름다운 것이라 개념 짓는다면 그러한 개념은 사랑이라는 것을 완전히 나타내지 못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지만, 관계와 상황에 따라 괴로운 귀찮은 슬픈 담담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이름 지어진 대상에 대한 한정적인 관념으로 개념을 짓는다면 그것은 대상이 가진 모든 가능성과 다양성을 축소하고 일방적으로 한정 짓는 것이다.


언어로 구성된 세계는 허구일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현상과 실상을 적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또한, 대상이 언어로 규정지어지고 그에 따른 개념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그것에 대하여 한정 짓 기대하 욕망하 욕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관념의 조작이다. 여기서 온갖 마음의 번뇌와 그릇된 분별심, 허황된 욕심에 의한 모든 인간사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로 인해 틀에 갇힌 사유로는 천지 만물에 대하여 우리가 규정짓고 원하는 일부만 보게 되 전체와 그 심연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여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 그 허구를 뛰어넘어 분별과 욕심을 내려놓아 우리가 규정지었던 것들에 대한 통념을 해체한다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온갖 가능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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