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OB Sep 26. 2023

디자인스튜디오 - 을의 거절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살아남기




웃으며 거절하기 - 친절하게 거절하기 - 다정한 거절 - 거절당할 용기 - 거절의 기술...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뜬 의도치 않았던 자기 계발 채널의 영상하나에- 무심코 눌러본 해당 영상의 밑으로 연달아 뜨는 다양한 관련 영상들. 문득 나 말고도... 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부탁과 거절이라는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구나 싶었다.


이번에 하려는 이야기는 디자이너의 거절. 을의 거절이다.



디자인이라는 영역은 어떻게 봐도 [서비스] 업이다. 그래서 어렵다. 상품과 같은 재화를 판매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른 부분들이 있는데… 항상 디자인적인 최종 결과물이 도출되기야 하지만, 단지 그 결과물의 가격으로 그 대가가 책정되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이 특히 그렇다. 도출된 최종 결과물을 포함하여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에 필요한 용역을 제공하고, 그 용역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이 깔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수요자(클라이언트)와 공급자(디자이너)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정하기 나름이고, 판단의 기준은 주관의 영역이다. 그렇다 보니 그 협상 과정은 지리멸렬한 공방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범위, 프로젝트의 견적, 프로젝트의 일정, 디자인의 완성도, 디자인의 수정에 대한 범위, 사후관리의 범위 등등. 뭐 하나 깔끔한 것이 없다. '협의'라는 이름 하에, '상식적인' 애매모호한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한다.


계약서를 아무리 세분화하여 꼼꼼하게 작성하더라도 언제나 애매한 회색지대는 생겨나기 마련이며, 해당 계약건 이후에도 있을 수요자와의 지속적인 관계성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대표자와 담당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중요한 업계인 만큼 평판도 신경 써야 한다. 이렇게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순간 디자인 스튜디오(를 비롯한 모든 디자이너)는 부탁과 거절로 이루어진 - 상처뿐인 - 공방전을 펼친다.




수요자와 공급자의 관계는 다른 말로 갑과 을로 표현되곤 하는데- 여기서 을이라 표현되는 공급자가 배짱 장사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수준의 부탁이나 요청들에 있어서 거절은 쉽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요청이 아닌 이상...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받아주는 부탁들. 그리고 이런 부탁들은 보통 하나하나 놓고 보면 실상 그렇게 어려운 일들도 아닌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그렇다고는 해도 하나하나 외주로 맡기면 30~100만 원은 족히 받을 일들...) 하지만 그런 일들이라도 하나하나 쌓이면 그 피로도는 상당하다.

"아니,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나요? 계약 사항은 아니지 않나요?"

하는 팀원들을 다독이며, 그래도 감사한 고객사니 이 정도는 우리가 조금 더 신경 써 드리자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씩 수용하다 보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결국 어느 순간 나 조차도 수용의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팀원들을 다독이던 스스로도 이제 한번 명확하게 거절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업을 한 지 10년이 넘었어도 언제나 이 순간은 힘들다. 그래도... 이 일을 10년 넘게 하면서 깨닫게 된 진리가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유쾌한 거절은 없다는 것.


어떻게 말을 하더라도 결국은 거절이다.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어차피 거절을 해야 한다면, 필요한 순간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물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거절에도 방법과 노하우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다.


정당하고 명확하게.


더 신경 써서 부탁이나 요청한 부분에 대해 계약사항을 넘어서는 과투입을 해 주는 입장임에도... 어중간한 태도를 보인다면, 상대방은 오히려 그냥 해줄 수 있고, 해 줘도 되는 일을 회피하려는 모습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부탁과 요청도 처음이 어려운 법. 한번, 두 번 받아주다 보면 어느 순간 부탁하는 것이 쉬워지고 당연해지며, 심한 경우 그 모든 추가 요청이나 부탁을 정당한 권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을에게 '정당한 거절'은 꼭 필요한 미덕이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서비스업이라는 특성상 모든 요청을 칼로 자르듯 잘라 낼 수는 없다. 수용가능한 부분은 쿨하게 수용해 줄 필요도 있지만- 거절이 필요한 순간에는 확실한 의사 표명을 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용 범위가 넘어가는 요청에 대해서는 명확히 명시를 하고, 그럼에도 진행이 필요하다면 추가 견적이 발생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안내해야 한다.


한번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끝이 아니다. 계약이 완료된 이후라도 필요에 따라 수요와 공급의 접점을 찾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디자인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디자인 자유이용권을 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간혹 흔하지는 않지만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이럴 경우- 심하면 프로젝트의 중단 혹은 파기까지 치닫는 경우도 발생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다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파국이 무서워서 해야 할 의사표명을 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돈도, 시간도, 명예도, 평판도, 심지어 포트폴리오조차 남지 않는다. 경험상 이렇게 끌려다니다 마무리되는 프로젝트는 결국 서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며 그 결과물 또한 어중간한 형태로 도출된다. 그리고 어찌저찌 마무리가 되었다 해도 해당 고객사와의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지속되거나 더 좋은 인연으로 가는 교두보가 되는 경우도... 없다. 그렇기에 을의 입장이라고 해서 해야 할 말을 못 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결론.


디자인 스튜디오는 언제나 할 일이 태산이다. 어긋난 인연에 연연하며 해야 할 일들을 놓치기보다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찾고,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함이 옳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