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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Apr 21. 2024

나날의 증명




약속하라!


_규칙 1 :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_규칙 2 :

수학 이외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_규칙 3:

나는 수학을 가르쳐주러 왔지만 시험이나 성적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내리뜬 눈, 렌즈 너머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나직하게 말하며 학생을 압도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희끗한 백발이 드문드문 섞인 머리칼과 깊은 주름이 인상적인 이 분.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선 사람 오금저리게 만들어 엘리베이터도 못 타게 하시더니 이제는 수학으로 말문 막히게 만드는 리학성(최민식)의 말씀이죠. 아! 저도 꼭 한번 애들 앞에서 저렇게 말해보고 싶군요.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처음으로 제곱근에 대해서 배웁니다. 실수라는 수의 체계에서 낯선 기호를 등에 업고 등장하는 이녀석들로 아이들이 목이 자라목이 될 정도로 긴장을 하죠. 보통의 중3 학생들 수학교재 맨 뒷장에는 1.00부터 99.9까지 이 숫자들에 대한 제곱근값이 근삿값으로 소수점 아래 3번째 자리까지 반올림되어 쭈욱 나열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 장을 보여주며 장난으로 "이거 1.00부터 99.9까지 다 외워야 해!"라고 말하죠.


 그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 얼굴이 사색이 되죠. (그 표정 보고 혼자 신나서 웃는 제가 나쁜 거죠?) 정말 귀엽잖아요. 시큰둥하고 무심한 표정 말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는 잠시의 순간이나마 그 표정들이 참 좋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슈퍼컴퓨터도 아니고 저걸 어떻게 외운다고 참인 줄 믿고 그러는지 그 순수함이 이뻐서 어쩔 수 없이 바로 제 거짓말이라 다독여주죠. 수학자들이 엄청 열심히 계산해 놓은 결과이니 정리된 표에서 네가 필요한 값만 찾아 계산에 쓰면 된다 말해줍니다. 그제야 안도하며 진도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어깨선이 편하게 내려앉아요. 왜 갑자기 수학이 나오는 학원 호러물을 갖고 왔느냐 물으신다면 말이죠. "굿 윌 헌팅"과 "파인딩 포레스트"의 계보를 이어갈 한국판 훈기 가득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만나 기뻐서 그래요.






 동훈고라는 학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인 이곳에 사배자(사회적 배려대상자)라는 방식으로 분류되어 선발된 한지우란 학생이 입학을 합니다. 일반고에 갔다면 내신등급 상위권을 유지할 영민한 아이지만, 동훈고에 입학하기 전 수학을 미적분 정도는 선수학습 다 하고 들어온 아이들 사이에서는 기도 못 펴고 수학 9등급을 맞으며 그야말로 악전고투 중이죠. 그러던 중 기숙사 룸메이트들의 심부름으로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논다 하는 녀석들의 내공이 돋보이는 메뉴, 참이슬과 제육볶음을 기숙사로 밀반입하게 됩니다. 그때 인민군이라 불리는 경비아저씨에게 들켜 지우는 종간나새끼란 호칭을 얻음과 동시에 기숙사 1달간 퇴실이란 엄벌을 받게 되죠.  



 이런 사실을 자기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지우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몰래 학교 안 외진 곳에 자리한 과학관에 숨어들어 노숙을 하려고 하죠. 이 또한 경비아저씨에게 들켜버리죠. 비에 흠뻑 젖은 지우를 보고 경비아저씨는 경비실에서의 하룻밤 묵어가게 해 주는데, 우연하게 쏟아진 지우의 가방 안에서 삐져나온 수학시험지를 보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막힘없이 풀어버립니다. 이렇게 둘의 인연은 얽히기 시작하죠. 서울대 출신, 포항공대 출신, 카이스트 출신들도 풀지 못한다는 동훈고의 최고난도 시험문제들을 막힘없이 풀어내는 경비아저씨. 대체 무얼 하던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보다 지우는 당장 내 성적을 향상해 줄 구세주라 믿으며 매달리죠. 그런 지우를 멀리서 바라보던 경비아저씨 학성은 서서히 아이에게 마음을 열며 가까워지게 됩니다. 딸기우유에 넘어간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지우가 틀어 준 핸드폰 손 바흐의 평균율을 생생하게 듣게 되어서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게 만드는 건 언제나 진심이죠. 정말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지우의 마음이 학성을 움직이게 하죠.  



 2달 뒤에 열리는, 학교내신에도 반영이 되는 동훈고 최강의 수학콘테스트 "피타고라스 어워드"를 위해 느리지만 최선 다해 준비해 가는 지우에게 학성은 내신등급을 올릴 찬스에 불과한 수학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아름다운 요소들 속에 숨어있는 수학에 대해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죠. 그런 학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빛이 멍해 있던 지우가 "파이송"이라는 원주율의 무한소수 자리숫자들로 이루어진 악보를 보며 처음으로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붙여놓은 곡이 바로 파이송이예요.





 학성과 지우의 대화 중 인상 깊었던 대사를 옮겨봅니다.


학성 : 수학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머리 좋은 아새끼들이 제일 먼저 포기한다.


지우 : 설마 노력 이런 거 아니죠?


학성 : 그다음에 나자빠지는 것들이 노력만 하는 놈들이야.


지우 : 그럼 뭔데요?


학성 : 용기


지우 : 아이 뭐, 아자! 할 수 있다! 이런 거요?


학성 : 고건, 객기고오. 문제가 안 풀릴 때는 화를 내거나 안 풀릴 때는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하, 문제가 참 어렵구나야.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풀어봐야겠구나아야. 이런 여유로운 마음.


고거이 수학적 용기다.

그렇게 담담하게 꿋꿋하게 하는 놈들이 결국엔 수학을 잘할 수 있게 되는 거이다.


여 보라야!

(지우가 풀었던 시험지들을 흔들며)

틀린 답은 많지만, 풀이 과정이 옳다.

전학가지 마라.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음서 여기까지 힘들게 오지 않았네?


그거이 된기야.

그러니까 증명하라, 전학이 옳은 건지, 그른건지.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동훈고에 입학한 지우를 일반고로 전학시키려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학을 고민하고 있던 지우에게 학성이 건네는 말이 제게 와닿습니다. 아들과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통일되면 두만강에 키우는 거북이를 풀어주자는 약속도 지키지 못한 학성이 은둔을 자처하고 살아가다 만나게 된 지우로 인해 서로 다른 둘이 지기가 되어갑니다. 느릿하게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모습도 좋았는데다가 지우를 독려하는 학성의 대사들이 마치 저를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거든요.

 


 무한대로 이어지는 제곱근 2를 보고 있으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우리들의 삶의 행로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복되나 겹치지 않는 숫자들처럼 하루하루가 이어지나 단 하루도 같은 적이 없는 시간들을 갈무리해가면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나아갈 방향을 찾으며 살아가죠. 나날의 증명이 차곡차곡 쌓여야 완성될 수 있는 숫자들의 행진처럼 말이죠.

때로는 남들보다 한없이 느리더라도 올곧게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게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된 용기이고 그 용기는 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주변인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답을 맞히는 것보다, 질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틀린 문제에서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이 대사를 곱씹었죠. 우리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어요. 정치, 경제, 종교, 문화면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때론 명제가 이상하게 변질돼버리고 사람들 사이 통용되는 유통기한조차 짧은  것들을 믿고 따르며 살고 있죠. 내 앞에 놓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자문할 틈도 없이 정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성마른 다그침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가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난 후 가만히 곰곰 중입니다.  



 같이 답을 찾고 싶은 분들은 이 영화 보시길 바랍니다. 우문현답들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어이없는 물음표 투성이어도 세상을 달리 보는 느린 거북이들의 현명한 답의 행진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더더더!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파이송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o.s.t


https://youtu.be/EJqRGtSiQIs














#이상한나라의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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