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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신 Mar 10. 2023

난 슬플 때 일기를 써

일기를 쓰게 된 최초의 경험부터 지금까지


1. 일기를 처음 쓰게 된 계기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본격적으로 일기를 썼다. 모든 초등학생이 그랬듯 나는 개학하기 10일 전 30일 치 일기를 적어야 했다. 어릴 적 나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기에 누구도 나한테 숙제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하 호호 놀다 개학하기 10일 전 고모가 할머니 집에 왔다. 그때부터 나는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기만 썼다.


 여름 방학 때 주로 집에 혼자서 보냈기에 일기에 쓸 소재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를 일기에 적었다. 수박 많이 먹어서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간 이야기, 모기가 모기장을 뚫고 들어온 이야기, 다라이(빨간 대야)에서 물놀이했던 이야기, 잠자리 잡은 이야기, 매미가 우렁차게 운 이야기, 텃밭에 토마토를 따 먹은 이야기, 소재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면 양치하는 이야기도 3번이나 우려먹었다. 주어인 아침, 점심, 저녁만 바뀌고 뒤 내용은 같았다. 내용이 부실해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어린 나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일기 중간쯤 오면 선생님도 집중력이 떨어지실 것 같으니 양치 이야기를 격일로 써도 자연스레 넘어가실 것 같았다.


 뜨거운 8월의 공기, 더운 선풍기 바람, 쩌렁쩌렁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 온종일 글 쓰고 그림 그리느라 오른손 중지에 생긴 굳은살. 오후 3시에 먹던 간식. 삶은 옥수수, 수박, 설탕에 절인 토마토, 우유에 타 먹는 코코볼. 초등학교 2학년 여름, 그림일기로 뜨겁게 불태웠다.


 개학을 했다. 나는 굳은살과 땀으로 낳은 그림 일기장 2권을 선생님께 제출했다. 선생님께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해주셨다. 어떤 말을 하셨는지 기억은 안 난다. 칭찬을 받아 좋았던 기분만 남아 있다.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었기에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일기 잘 쓴다는 칭찬에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2. 일기가 재밌어진 계기Ⅰ: 일기상


 나이스라는 사이트에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발급받았다. 생활기록부 여러 항목 중 수상 경력에 ‘일기상’을 두 번이나 받은 기록이 있다. 2002년 5월 24일에 한 번, 같은 해인 11월 30일에 한 번.





3. 일기가 재밌어진  계기Ⅱ: 제일 재밌는 책


 2002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매일 아침 시간에 300자 일기 쓰기를 시키셨다. 일기를 다 쓰면 1교시 전까지 운동장에 나가 뛰어놀 수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싶어 열심히 칸을 채웠다. 그때 2개월마다 한 번씩 아침마다 썼던 일기를 선생님께서 책으로 만들어주셨다. 

 책의 모습은 앞표지는 컬러가 있는 A4용지에 ‘꿈과 희망’으로 시작하는 제목과 그 밑에는 우리들의 사진과 그 밑에는 학년과 이름이 프린트되어 있다. 표지와 일기를 스테플러로 찍어 책으로 만들어주셨다. 집에 가져와서 심심할 때마다 일기를 꺼내 읽었다. 나는 내가 쓴 일기에도 배와 광대가 아플 만큼 웃었다.


 어릴 때 일기를 꾸준히 적을 수 있었던 건 강제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재미였다. 그땐 잘 쓴 글, 못 쓴 글에 대한 인지가 없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보다 재밌는 일기를 쓰고 싶었다. 쓸 때도 재밌고 나중에 다시 읽을 때도 재밌는 글.




4. 일기가 재밌어진  계기Ⅲ: 내 이야기가 제일 재밌어


 부끄럽지만 나는 어릴 때 책을 거의 안 읽었다. 세상엔 책보다 재밌는 게 많았다. 친구들이랑 술래잡기, 숨바꼭질, 딱지치기, 경찰과 도둑, 오징어 게임, 싸인빵 하는 걸 좋아했다. 또, 챙겨봐야 할 만화와 드라마도 많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전날 봤던 만화와 드라마에 대해 리뷰를 해야 했다. 주니어 네이버에서 게임도 해야 했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랑 둘이 살았다. 할머니가 MBTI 검사를 했다면 다른 유형은 잘 모르겠지만 E는 확실하다. 집에는 늘 동네 할머니들이 놀러 왔었다. 할머니들의 대화를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일상이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 덕분에 나는 늘 일기에 쓸 내용이 많았다. 처음엔 사건 중심으로만 쓰다 점차 사건 중심과 내 생각으로 조금씩 발전해갔다. 이때부터 나는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게 재밌었다.




5. 일기가 재밌어진 계기Ⅳ: 문구쇼핑


 나는 볼펜, 노트, 스티커 사기를 좋아한다. 문구점에서 새로운 볼펜과 노트 그리고 스티커를 탐색한다. 그중 내 눈에 드는 걸 고른다. 볼펜 같은 경우 테스트를 해본다. 테스트 용지에는 보통 ‘안녕’을 쓴다. 다양한 볼펜들과 인사를 한 후 나와 잘 맞는 펜을 고른다. 내 글씨체와 노트와 딱 맞는 펜을 찾을 때면 4~5자루씩 쟁여둔다.


 어릴 땐 마음에 쏙 드는 볼펜과 노트 그리고 스티커가 귀하게 느껴져 모셔두다 똥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은 마음에 들면 그날 바로 사용한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으므로 가장 좋아하는 순간에 사용해야 한다. 모셔두고 있을 때보다 사용할 때 훨씬 더 좋아지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이든 물건이든 본업에 충실할 때 가장 멋진 것 같다.

 

‘펜을 들어 종이 위에 무언가 쓰는 재미, 문구에 대한 애정이 무엇보다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일기 쓰는 법> 서문에 나온 이 문장에 나는 절로 ‘맞아요. 맞아!’ 소리 내어 대답했다.




6. 일기 쓰기의 장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기장에조차 나는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분명 따뜻하고 예쁜 단어들만 골라 쓰는 데 뭔가 불편했다. 나에게조차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이 됐다. 완전무결에 가까운 사람은 부처와 예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는 편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들추고 싶지 않던 내 구린 모습을 발견하는 건 반갑지 않다. 그냥  그것을 직면하고 웃음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한번 웃고 나면 구린 내 모습을 또 발견할 때 움츠러들기보다 ‘어 왔어?’ 하는 여유가 생긴다.


 내 안에 구린 모습들이 많다. 그래서 자주 움츠러들고 자신에게 화가 난다. 오늘 아침에도 발견했다. 

 ‘나는 00 이를 부러워해. 그래서 열등감을 느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괴로워 회피하다 일기장에 시원하게 썼다. 구질구질한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진짜 구질구질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일기장에 시원하게 쓴다.




4. 마무리


 일기는 늘 어른들 말씀만 듣는 위치에 있다 내 경험과 생각을 글로 적어 보게 된 최초의 경험이다. 선생님께 일기를 잘 썼다는 칭찬과 상을 받은 경험 덕분에 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일기를 쓰면서 나를 알아가고 모호했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겨 좋다. 여전히 펜과 노트 사기를 좋아한다. 펜과 노트를 사기 위해서 일기를 쓰는지, 일기를 쓰기 위해 펜과 노트를 사는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좋다. 일기를 재밌게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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