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구 Feb 28. 2020

프롤로그. 나도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말했다. 남의 돈을 받고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한다고. 나는 그 말에 반발심이 들어 뾰족하게 대꾸했다. 내가 일한 댓가로 받는 건데 왜 고마워야해? 엄마는 이런 나를 보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세월이 흘러 나는 '남의 돈을 받고 일하는' 어엿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대단한 일들을 해내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화려하고 멋진 어른이 될거란 기대와는 달리 끝없이 늘어가는 단순 업무들과 생기 없는 얼굴, 기계적으로 두들기는 자판 소리, 끊이지 않는 '넵!'과 '넵~'들, 졸음을 쫓아내기 위한 맛 없는 커피 몇 잔만 곁에 둔 시시껄렁한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시간을 보낸 후 집에 와선 주로 쇼핑을 했다. 돈을 벌면 그 즉시 별 쓸데 없는 것들을 샀다. 만족스러운 성과가 없으니 유형의 물질이라도 소비해야했다. 소비한 물건은 내가 일해서 얻은 성취로 둔갑했고, 그것을 자랑하는 게 나의 성공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소비는 공간만 채울 뿐 마음을 채우진 못했다. 사들인 물건 대부분은 금방 잊혀졌고, 남는 게 없는 것 같은 공허함과 허탈함은 또 다른 소비로 이어졌다.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 둔 물건의 제대로 된 쓰임을 찾고 활용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물건은 '책'이었다. 지적허영심에 절어 주변에서 좋다는 책은 빠지지 않고 샀는데 정작 손을 탄 책은 몇 권 안됐다. 안 읽은 책을 추리고, 분야별로 정리했다. 그 중 가장 관심있는 분야의 책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다. 읽다보니 모르는 것이 생겼고, 사람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갈증이 생겼다. 그렇게 만들게 된 것이 페미니즘 독서모임 들불이다.


시작은 우스울 정도로 단순했다. 대단한 기치 아래 사람들을 모아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페미니즘 책을 읽고 우리의 견문으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그럴듯한 욕심도 없었다. 그저 내 지적 욕구를 채우는데 갈급해서 만든 모임이었다. 이렇게 허술한 마음가짐으로 무작정 저지른 일에 3명이 올라탔고, 함께 규칙을 만들었다. 들불이 시작된 최초의 발화점이었다.


나와 팀원들이 십시일반하여 의뢰제작한 들불의 로고


그렇게 시작된 들불은 어느덧 햇수로 4년차에 접어들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들불 운영 원칙을 정했다.


첫째, 여성만 가입 가능한 모임일 것.

둘째, 책을 완독하지 않아도 참여 가능할 것.

셋째, 서로의 나이, 지역, 학력을 묻지 않을 것.


내가 만든 모임이니 원칙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외에도 그 때 그 때 자잘한 원칙들을 만들어갔다. 한국 사회에선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만한, 하지만 나와 구성원을 최대한 존중해줄 수 있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원칙들이었다. 모임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과 가치를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짜릿했고, 구성원들이 내가 만든 원칙에 쉽게 수긍해주는 모습에 짜릿함은 배가 되었다. 이 짜릿함이 나를 이끌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돈을 벌지 못해도 짜릿함을 동력 삼아 움직였다.


당연히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좋았다. 여성이 운동하는 책, 여성이 돈 버는 책, 여성이 혼자 사는 책, 여성이 정치하는 책, 여성이 철학하는 책..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그 책의 소재를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운동하는 책을 읽은 날엔 다같이 운동을 하고 싶었고, 돈 버는 책을 읽은 날엔 다같이 금융 공부 모임을 열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모임을 벌이기에 들불은 그 자체만으로도 규모가 꽤 커져버렸다. 모임 운영은 내가 바라고 좋아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포맷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가능했다. 이보다 규모가 커지면 나 혼자서는 운영이 어려울 것이 자명했다.


운영비도 문제였다. 모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여러 항목에서 품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가끔은 할 일이 끊이지 않는 무료 봉사처럼 느껴졌다. 들불을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좋아서 하는 일=무보수라는 이상하지만 당연한 세상의 공식이 있었고 비용을 들여가며 벌인 일에 회의감이 들 때마다, 사람들에게 내 노고에 대해 생색내고 싶어질 때마다, 짜릿함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공식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마음을 다잡는 주기가 갈수록 짧아졌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내겐 용기가 부족했고, 모임 확장의 꿈은 요원해보였다.


그러다 떠밀리듯 2020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뜻밖에 예의 그 '이상하지만 당연한'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좋아하는 일을 무작정 벌여놓고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시대의 변화가 내면의 변화를 불러왔다. 들불을 시작했던 것처럼 커뮤니티 운영도 무턱대고 시작해보면 되지 않을까? 왠지 모를 근자감이 생겼다. 곧장 먼저 시작된 다양한 독서 커뮤니티 사업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성공담을 기웃댔다. 기웃대다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의 노하우를 토대로 커뮤니티 사업을 하게 되면 내가 하고 싶었던 다양한 모임들을 지치지 않고 멋지게 운영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설렘에서였다.


그래서 그냥 한 번 저질러보기로 했다. 무작정 들불을 만들었던 것처럼 무작정 이 모임을 사업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말이다. 나와 팀원들이 일에 대한 합당한 보수를 받아 지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내실 있는 운영원칙을 세우고, 모두가 즐겁게 참여할 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로써 들불을 유용한 사회적 자원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남의 돈을 받고 일할 수 있는 데에 감사하는 삶 말고, 조금 벌더라도 즐겁고 재미난 일을 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여성들에게 감사하는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막 시작된 나의 어설프고 무모하고 조마조마한 사업 여정을 당신과 함께하려한다. 이 글은 어쩌면 엄마가 말한대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적어보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하나의 작은 불씨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