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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짧고도 긴 여행

달려라, 산책



달리기를 하고 왔다. 9월 1일의 달리기. 5월 31일에 시작해서 오늘까지 총 88일을 뛰었다. 6월과 7월에는 비가와도 폭염 주의보 같은 재난 문자가 쏟아져도 달렸지만, 8월에는 마의 치과 진료, 치과 치료의 하이라이트 신경 치료가 두 번 포진해 있어서 주 5일 달리기를 2주 했다. 어제는 8월의 마지막 날이어서 꼭 달리려고 했으나 호우주의보라니, 뉴스에 나올 행동은 하지 않기로 하고 9월을 맞이했다.




달리기를 하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달리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달리기는 꽤 심심하다. 그러니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데드 포인트(운동을 때려치고 싶게 숨이 턱 까지 차오르는 지점)를 지나서 세컨드 윈드(숨이 고르게 쉬어지며 지구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지점) 상태에 도달하기 까지 첫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지루함과의 줄다리기가 계속 된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이전에는 뛸까 말까 하는 무수한 내적 갈등이 존재한다.


더위가 한창일 때, 뛰러 나갈 때 마다 ‘진짜 덥다, 꼭 뛰어야 겠니?’ 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럴 때 마다 두 번째 자아는 대답을 않고, 셋째쯤 되는 자아가 말한다. ‘야아, 그래도 오늘은 바람도 좀 불고 뛸 만 해.’ 넷째가 답한다. ‘오늘 뛰면 레벨 업?’ 그러다보면 꼬득이던 첫째가 나이키 런 앱을 열어 레벨 업까지 몇 킬로미터가 남았는지 확인한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둘째가 말한다. ‘이제 간다.’ 어느 새 달리고 있는 내 다리, 이곳이 어디인지 자아가 몇 개 인지 묻지 마세요.




그러니 언제쯤 달리기가 신나고 재미있어질까, 막 뛰고 싶어 설레일까. 암만 생각해도 처음 얼마간(좀 덜 힘들어지고 나서 거리를 조금씩 늘려나갈 때) 빼고는 거의 반대의 마음인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양재천에 선다. 그러다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다리가 움직인다. 걷지 마, 뛰어. 지금까지 걷는 것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달리는 지금, 불혹을 넘어선 지금은 여태껏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지금의 안온함, 머무르고자 하는 마음에 유혹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그간의 습관, 관습 등에 머무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는 시기. 포장에 미혹되지 말고 알맹이를 잘 들여다볼 시기라고.




그렇게 달린다. 오늘의 시간을 복기하면서 지금의 시간을 달리고 일기를 쓸 앞으로의 시간을 머릿속에 기록한다. 몇 겹의 시간이 흐른다. 이 시간이 좋다. 오늘도 겹겹의 크로와상 같은 시간, 딱 5킬로미터를 뛰었다. 이어폰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느 날 나를 아프리카 초원으로 이끌었다가(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템즈 강변을 달리게도 했다가(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바싹 마른 흙이 깔린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윤상의 달리기).




9월 1일의 달리기를 기록하고 싶다. 반바지 바깥으로 나온 맨다리에 닿는 식은 공기와 풀벌레의 울음소리, 양재천변에 맞닿은 산책로 위에 선 낡은 러닝화, 그리고 반짝이는 휴대폰의 초록 불빛. 스타트 라인에 선 선수처럼 비장하게, 이어폰을 귀에 잘 (쑤셔) 넣고 나이키 런 앱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음악 때문에 멈출 수 없으니 오늘은 템즈강 감성으로 선곡은 (보통 대충하는 편이지만) 오아시스와 콜드 플레이,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중에 하나를 택하고, 달린다. 오가는 이들이 많은 체육공원 옆을 지나면 인적이 드물어지고, 그린벨트 지역에 포진한 갈비집 몇 군데에서 숯불 냄새가 흩날리며 허기를 깨우지만, 이 유혹의 지점을 지나면 하얀 새, 그러니까 그 신선 같은 자태로 고고히 서 있는 왜가리인지, 두루미인지, 학인지 이름은 모르나 늘 자주 뵙는 흰 새 선생이 꼿꼿하게 지키고 있는 화훼 농가 주변이 나온다. 이쯤이 보통 2킬로미터, 경마공원 갈림길을 지나쳐 과천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선바위 역의 끝까지 가면 2.6킬로미터 (내 마음 속 1차 회차지점), 오늘은 서초구의 아파트 불빛을 등대 삼아 조금 더 달려 본다. 나이키 런 안내원이 3킬로미터를 달렸다고 말해주는 곳에 여름 내 피어있던 접시 꽃이 사라지고 노란 애기똥풀이 보였다. 그쯤에서 다시 돌아 달리면 온통 초록이다. 내려올때와는 다른 초록, 다른 하늘이 펼쳐진다. 달이 뜬 날은 달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늘은 검은색이 짙게 섞인 남청빛 하늘 아래로 두루마리 구름이 펼쳐져 있다. 조금 더 뛸까, 그만 뛸까, 하다가 달린 거리를 확인하니 4.5킬로미터였다. 500미터만 더 달리면 되지만, 슬슬 다리가 아파온다.


멈추고 싶은 한 걸음이 목표를 향해 뛰어야 하는 한 걸음이기도 하다. 멈추고 싶지만 움직여야 도달할 수 있는 것. 달리기가 알려준 그 오묘하고도 경계 없는 진리를 가슴에 품고 속도를 조금 더 내본다. 바람막이를 벗어 허리춤에 둘러매고 살갗에 닿는 찬 공기로 땀을 식힌다. 어느새 노래는 끝나 있고, 성당 종탑 불빛이 신호를 보낸다. 웰컴. 삼십 분의 짧고도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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