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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선 맥주, 후 달리기

달려라, 산책


맥주를 마시고 들어왔다. 달리기에 힘을 쏟기 시작한 지난 여름 부터 지금까지 넉 달 동안, 거의 금주하다시피 살다가 요즘 다시 야금야금 마시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려면 술을 끊어야 돼, 까지는 아니어도 달리기와 음주는 친해지기 어려운 관계이므로 자연히 달리기에 공을 들이면서 술은 멀리 하게 됐다. 친구 중 한 명이 내가 달리는 걸 알고 나서 ‘맥주가 생각날 땐 깔라만시지!’ 하며 깔라만시 원액을 준 것도 주요했다. 당연히 알코올의 알싸함은 없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코끝을 찡그리게 만드는 신 맛과 탄산수와 함께 마시면 청량한 맛도 있어서 대체품으로 유용하게 마시고 있었다. 아, 하지만.


그래, 변명을 하기 보다는 맥주를 끊을 수 없는 나를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달리기는 아침에 하고 저녁에는 얼마든지 맥주를 마셔도 된다. 조기축구회 회원들의 마음으로, 운동 후 한 잔은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니까 운동 후 음주가 유익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강도 높은 운동으로 간 건강도 좋아졌을 테니까.


가을방학을 길게 가졌다. 집안의 행사와도 같은 가을 여행은 보통 추석 연휴를 끼고 일주일 정도 일정으로 다녀온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양조장들을 찾아다니는 게 큰 즐거움이다. 이번엔 여수에서 오매 브루어리에 들러 여수 맥주를 세 캔 사와 마셨다. 통영에서는 좋아하는 맥줏집에 가서 주인이 추천하는 IPA맥주와 벨기에 양조장의 무알콜 맥주를 사왔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까 일주일 여행은 식전주에 불과했다. 지난 설 연휴에 다녀온 여행 이후 내내 동네에서 맴돌았던 몸과 마음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글날이 있는 대체 공휴일에 우리는 또 한 번의 여행을 계획했다. 속초에 가자. 오징어 순대도 먹고! 그래, 문우당도 가고. 무엇보다 설악산 자락 아래 우리가 좋아하는 브루어리가 있지! 일요일 새벽 6시 반에 출발해 속초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고 고성으로 여행 온 친구네를 우연히 만났다. 두 가족은 봉포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편의점 맥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두 집 아이들은 장칼국수나 감자옹심이 보다 해변에서 먹는 컵라면이 최고였고, 어른 들 역시 네 캔에 만원하는 편의점 맥주와 푸드 트럭에서 사 온 타코야끼와 듀스와 태사자의 노래면 충분했다. 그렇게 한 나절을 놀다가 겨우 헤어져(헤어짐의 장소 역시 속초의 몽트 비어) 숙소에 짐을 풀고 갯배 승선장 주변을 산책했다. 이미 배는 충분히 부른 상태였고, 동네에 뭐가 있는지 구경이나 하자며 나선 길이었는데, 어랏! 노출 콘크리트에 대로 변 바깥 창문을 모두 열어 둔 상점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생맥주 기계를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하얀 벽 한 면에 가득한 서퍼 영상과 붉은 네온 사인의 피자 모형이라니. 나는 남편을 꼬득여 피자집에 앉자마자 익숙하게 산미구엘과 치즈피자를 주문했다.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와 헨리 치나스키(찰스 부코스키외의 소설 속 주인공)가 그 맛을 알려 주면서 시작한 나의 맥주 생활은 냉소바와 크림치즈 창란젓, 굴튀김과 칠리치즈, 치즈피자와 후라이드 반 양념 반과 함께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날씨 탓이었다. 한 겨울의 추위는 탄산의 알싸함으로, 봄의 보송함은 씁쓸한 끝맛으로, 여름의 끈적한 습기는 목 안에서 터지는 청량감으로 넘겼다. 그리고 가을. 남청색의 밤 하늘 위로 흰 구름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뜬 가을 밤에는 풀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를 입안에 맴도는 몽글몽글한 맥주의 기포들로 삼켰다. 터질 것도 알고 사라질 것도 알지만 첫 모금의 찌릿함이 때때로 저릿하게 가슴을 타고 흐른다.


초록이 매우 초록인 나무 아래, 둥근 벤치에 앉아 E로 시작하는 맥주를 땄다. 탁, 치익.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첫모금을 들이키며 ‘아, 좋다.’ 감탄을 내뱉었다. 아직은 반바지에 맞닿는 서늘한 가을 공기가 반갑고, 반팔 티 위에 걸쳐 입은 바람막이 점퍼의 바스락 거림이 따뜻하고 하늘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색으로 점점 더 빠져드는 계절. 곡식이 완연히 그리고 부지런히 익을 시기인 이때 마시는 맥주에는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이 들어있다.


가을 밤 맥주를 함께 한 이가 이야기 해 준 호두나무 스피커를 저장하고 그가 들었다는 메조 소프라노를 검색하면서 가슴까지 와서 닿았다는 스피커와 음악에 대해 그려본다. 입 안 가득한 한 모금이 심장 근처를 지날 때,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찰나, 내 몸이 울림통이 되어 소리와 함께 메아리 쳤을 그런 때와 비슷했을까, 궁금하다.


남은 한 캔의 맥주를 딴다. 한낮의 종종거림이 있었고 밤의 적막이 있다. 목 안으로 넘어가는 맥주의 지류를 따라 하루가 흘러가고 또 진동한다. 마치 소리 없는 소리 같은 흐름이 발끝까지 전해지면 나도 울림통이 되어 메아리로 돌려준다.


이만하면 오늘도 잘 지냈다. (달리기는 아침에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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