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을 포용하고 진보를 촉진하며 발전을 낳기 때문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우리는 언제부터 세계를 읽기 시작했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많은 학부모들은 아이가 한글을 떼던 날, 처음으로 '엄마'라고 쓴 순간, 혹은 그림책의 문장을 더듬거리며 소리 내어 읽던 순간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간, 아이가 세상에 눈을 뜬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는 글자를 배우기 전에 이미 어머니의 얼굴에서 미소를 읽어냈고,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에서 패턴을 이해합니다. 방 안 가득 채워진 사물들의 형태와 색채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감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의 문해력'입니다.
'이미지가 사유의 근원'이라는 통찰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발견됩니다. 철학의 영역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시네마 1』에서 이 주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의 시간/운동 개념과 기호학자 퍼스(Peirce)의 기호 분류를 바탕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새로운 사유의 방식(Image of Thought)을 창조해 내는지를 철학적으로 분석합니다. 들뢰즈는 이미지를 '지각-이미지', '정서-이미지', '행동-이미지' 등으로 분류하며, 이미지가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와 개념을 생성하는 힘을 가졌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뇌는 언어적 기호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먼저, 그리고 더 빠르게 처리합니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시각 정보 처리 속도는 언어 정보 처리 속도보다 약 6만 배 빠릅니다. 아이가 '사과'라는 글자를 읽기 전에 이미 빨갛고 둥근 형태를 사과로 인식하는 이유, 추상적인 '위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날카로운 모서리나 높은 곳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현대 신경과학의 발견과도 일치합니다. 인간의 인지 구조 자체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의 뇌는 언어적 기호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먼저, 그리고 더 빠르게 처리합니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시각 정보 처리 속도는 언어 정보 처리 속도보다 약 6만 배 빠릅니다. 아이가 '사과'라는 글자를 읽기 전에 이미 빨갛고 둥근 형태를 사과로 인식하는 이유, 추상적인 '위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날카로운 모서리나 높은 곳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왜 이미지의 문해력이 더욱 중요해졌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언어 모델이 진화할수록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의 영역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공지능은 수백만 개의 텍스트를 학습하여 문장을 생성할 수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내면에서 형상화하고, 그 형상에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새로운 창조의 재료로 전환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입니다. 이미지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 '생각하며', 그 생각을 다시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이 순환적 과정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사유 방식입니다.
볼 줄 아는 아이가 생각할 줄 안다
제가 멘토링을 할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제자가 분수(分數) 문제를 풀다 쩔쩔매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½과 ⅓ 중 어느 것이 더 큰가"라는 문제 앞에서 아이는 숫자 2와 3에만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3이 2보다 크니까 ⅓이 더 큰 거 아니야?"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연필과 종이를 주며 말했습니다.
"숫자 보지 말고, 똑같은 피자 두 판을 그려봐."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똑같은 크기의 원 두 개를 그렸습니다. 하나는 두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을 칠했고, 다른 하나는 세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을 칠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색칠한 면적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제야 환하게 외쳤습니다.
"아! ½이 훨씬 크네!"
그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추상적인 '기호'의 함정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이에게 '3'은 '2'보다 크다는 강력한 기호 규칙이었습니다. 하지만 '⅓'이라는 기호를 '피자 세 조각 중 하나'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번역하는 순간, 문제는 저절로 풀렸습니다.
핵심은 '이미지로 사유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추상적 기호가 내면에서 어떤 형상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때, 아이의 사고는 막혀버렸습니다. 반면 기호를 이미지로 번역하자, 그 이미지를 통해 '양'이라는 개념을 온전히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강점관점 접근의 교육법에 관심이 있어 다중지능을 창시한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를 맹신한 적이 있습니다. 멘토링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척도를 통해 강점지능을 찾아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의 저서 『마음의 틀(Frames of Mind)』 등은 창조적인 사람들을 이론적 양식에 따라 분류하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분할선을 긋는 것처럼 단 한 가지 요인을 가지고 개인을 분류하는 것이죠. 이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입니다.
가드너는 아인슈타인을 '논리-수학적 지능'이 탁월한 인물로 분류했습니다. 더불어 많은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수학적 천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수학을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직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心像)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상상력과 직관으로 통찰을 얻었습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역시 문제를 풀지 않고 '느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피자 조각의 '이미지'를 통해 분수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듯, 아인슈타인 역시 '심상'을 통해 우주의 '본질'을 직관한 것입니다. 둘 다 '숫자'나 '기호'라는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하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이미지를 통해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진정한 문해력은 반드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정신이 작동해야 지성과 통합되는 것입니다. 상상력과 통찰은 지성의 원천입니다.
심리학자 앨런 파이비오(Allan Paivio)의 이중부호화 이론(Dual Coding Theory)은 이러한 현상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인간의 기억과 이해는 언어적 코드와 시각적 코드라는 두 가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연결된 체계를 통해 작동합니다. 정보가 두 가지 코드로 모두 부호화될 때, 즉 언어로도 이해되고 이미지로도 형상화될 때, 그 정보는 더 깊이 이해되고 더 오래 기억되며 더 유연하게 활용됩니다. 책을 읽을 때 장면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이해도 차이가 극명한 이유, 그리고 방금 본 것처럼 수학 문제를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는 아이가 추상적 사고력이 뛰어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추상으로 가는 지름길
많은 학부모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추상적 사고와 구체적 이미지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마치 아이가 구체적인 것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것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지발달의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추상은 구체를 버리고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를 충분히 경험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도달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가 말했듯, 아이는 구체적 조작기를 거쳐야만 형식적 조작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구체적 조작'의 핵심 매개체가 바로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구체적 조작'은 아이의 손에 쥐어진 '빨간 블록, 파란 블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형식적 조작'은 이 블록들로 완성된 '멋진 우주선'입니다. 추상적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멋진 우주선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아이는, 그 누구보다 블록을 지겹도록 만지고, 끼우고, 조립해 본 아이입니다. 그럴수록 더 멋진 우주선이 완성됩니다. 추상은 구체를 버리고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블록이 머릿속에 수천, 수만 개가 쌓여 '내면화'될 때, 비로소 아이는 그 재료들을 조합하여 '우주선'이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아제가 말한 '구체적 조작기'(손으로 블록을 탐색하는 단계)가 '형식적 조작기'(머릿속으로 블록을 조립하는 단계)의 필수적인 재료가 되는 이유입니다.
'자유'라는 다소 난해한 개념을 생각해 봅시다. 어른인 우리도 자유를 정의하라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유를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들판을 달리는 말,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새, 울타리를 넘어서는 순간, 족쇄가 끊어지는 장면, 감옥 창살 사이로 보이는 한 줄기 빛과 같이 이 모든 구체적 이미지들이 모여 '자유'라는 추상 개념을 구성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용기', '사랑', '정의', '고독'과 같은 추상 개념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에 앞서 그러한 가치를 담은 이미지들을 충분히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책이 단순한 유아용 읽을거리가 아닌 이유입니다. 작품성 있는 그림책은 언어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정서와 추상적 개념을 이미지로 형상화합니다. 존 버닝햄의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아이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데, 그 기차에는 코끼리가 타고, 물개가 타고, 북극곰이 탑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그림 속에서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이는 이 이미지를 통해 '상상의 자유', '경계 없는 환대', '불가능의 가능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체험합니다. 명시적인 교훈이나 설명 없이, 오직 이미지의 힘으로 말입니다.
현대 뇌과학은 이러한 직관을 뒷받침합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데카르트의 오류(Descartes' Error)』라는 유명한 저서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이성 중심적 관점, 즉 마음(이성)과 몸(감각)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와 같은 세계적인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추상적 사고는 결국 감각-운동 경험에 기반한 '신체화된 시뮬레이션'입니다.
우리가 '위로 올라간다'는 개념을 이해할 때, 뇌의 운동 피질이 실제로 활성화됩니다. '따뜻한 포옹'을 생각할 때는 온도를 감지하는 영역이 반응합니다. 추상적 사고는 공중에 떠 있는 순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의 이미지들이 복잡하게 조합되고 재구성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미지 문해력이 약한 아이는 필연적으로 추상적 사고에서도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추상을 구성할 구체적 재료, 즉 이미지의 저장고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학령전기에 그림책 1,000권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훈련
그렇다면 이미지의 문해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미지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 없는 이야기'의 힘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림책, 애니메이션, 유튜브 영상, 게임—모든 콘텐츠가 고도로 정교한 시각 정보를 제공합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이미지가 '이미 완성된' 이미지라는 점입니다. 아이는 수동적으로 제시된 이미지를 소비할 뿐,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훈련받지 못합니다. 마치 늘 음식을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씹는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 것처럼, 완성된 이미지만 보여주면 내적 시각화 능력이 발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이미지 문해력 훈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 즉 텍스트를 읽으면서 스스로 장면을 상상하고 형상화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림 없는 동화를 읽은 후 장면을 상상하게 합니다. 아이와 함께 이솝 우화나 전래동화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고 물어보십시오. "지금 이 장면이 어떻게 보이니?" "토끼가 서 있는 숲은 어떤 모습일까?" "거북이가 걷는 속도는 얼마나 느릴까?" 이때 중요한 것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고유하고 타당합니다. 핵심은 아이가 언어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그 과정 자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감각적 질문으로 이미지를 구체화합니다. 단순히 "어떻게 보여?"라고 묻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을 동원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이 장면은 무슨 색깔이야?", "어떤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이 이야기는 무슨 냄새가 날까?", "만약 네가 그 장면 속에 있다면 기온은 따뜻할까 추울까?" 이러한 질문들은 아이로 하여금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공감각적 이미지'를 형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층적으로 구성된 이미지는 훨씬 더 강력하고 생생하며, 오래 지속됩니다.
셋째, 이미지를 언어로, 언어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쌍방향 훈련을 합니다. 그림을 보여주고 "이 그림을 이야기로 만들어볼까?"라고 묻는 것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볼까?"라고 묻는 것을 번갈아 시도하십시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 다른 '번역' 체계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두 체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을 키웁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다중 문해력'입니다.
넷째,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는 훈련을 합니다. 우수한 문학작품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이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상징입니다. 여우는 동물이 아니라 관계와 책임의 은유입니다. 아이와 함께 이러한 작품을 읽으면서 "왜 작가는 사랑을 직접 말하지 않고 장미로 표현했을까?", "여우가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십시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아이는 이미지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의미를 담는 그릇이며, 때로는 언어보다 더 깊은 진실을 전달하는 매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훈련'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재료는 무엇일까요? 제가 가장 추천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코칭을 받는 부모님들의 대부분이 하는 활동입니다. 아이가 잠들기 전 매일 밤 그림 형제의 『민담집 (Kinder- und Hausmärchen)』을 한 편씩 읽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 오늘날 아이들을 위해 순화되고 각색된 '동화(Fairy Tale)'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민담(Folktale)'이라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수백, 수천 년 동안 평범한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생생한 구전 문학의 정수이며, 야콥과 빌헬름 그림 형제는 동화 작가가 아니라, 독일 민족의 언어와 정신을 보존하려 한 엄격한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로서 이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엮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민담'이 AI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최고의 '이미지 문해력' 교재가 될까요?
민담은 철저히 '이미지'를 제거한 텍스트입니다. "옛날 옛적, 숲 속 깊은 곳에..."라는 문장이 시작되는 순간, 아이는 TV나 그림책처럼 완성된 이미지를 '소비'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의 어둡고 깊은 숲, 자신만의 무서운 마녀, 자신만의 빛나는 성(城)을 머릿속에서 스스로 '창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민담에는 '인간의 욕망과 거대한 사유'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민담들은 현대의 동화처럼 '착하게 살자'거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자'는 동심천사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근원적 공포', 『신데렐라』의 '형제자매 간의 극심한 질투와 경쟁', 『백설공주』의 '왕비의 맹목적인 적개심'처럼, 아이들이 실제 내면에서 느끼지만 차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감정, 욕망, 폭력성, 그리고 갈등을 상징적 이미지(어두운 숲, 마녀, 재투성이, 독사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교육자인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그의 명저 『옛이야기의 매혹 (The Uses of Enchantment)』에서, 바로 이 '날것'의 잔혹하고 기괴해 보이는 민담들이 아이들의 내면적 혼란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아이는 이 민담 속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공격성, 욕망을 안전하게 '체험'하고 '사유'하며, 마침내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듯 스스로 정서적 통합을 이룹니다. 아이는 교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수천 년간 축적해 온 '무의식의 이미지'라는 가장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미지가 사유를 낳는' 가장 강력한 훈련입니다.
이미지가 사유를 낳고, 사유가 창조를 낳는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미지는 의식의 불꽃이다"라고 썼습니다. 이미지는 단순히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과 발명들은 모두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형상화된 이미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이미지를 보고 중력을 사유했고, 아인슈타인은 빛을 타고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상대성이론을 구상했으며, 스티브 잡스는 캘리그래피 수업에서 본 아름다운 글꼴의 이미지를 기억해 매킨토시의 폰트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AI 시대, 기계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인식하며 언어를 생성할 수 있게 된 지금,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없던 이미지를 창조하는 능력', '경험하지 않은 것을 마음속에서 형상화하는 능력',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의 근간에는 바로 이미지의 문해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그저 지나치는 현상 속에서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의미를 포착하며,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어린 시절 충분히 상상하고, 충분히 형상화하며, 언어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경험에 있습니다.
문해력은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닙니다. 세계를 읽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세계를 읽는 첫 번째 언어는 언제나 이미지였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을 때, 단순히 문장을 따라가는지 확인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눈 뒤편의 마음속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진정한 문해력은 눈에서 시작되지만, 마음의 눈에서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