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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을 품는 능력 -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당신의 모든 것을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지금 당장 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답은 당신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질문들을 사랑하십시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선생님, 그래서 정답이 뭐예요?"


북클럽에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은 후 토론하던 제자가 긴 토론 끝에 던진 질문입니다. 우리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들려주는 55개 도시 이야기를 함께 읽었고, 각 도시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왜 작가는 실재하지 않는 도시들을 만들어냈는지, 기억과 욕망이 어떻게 도시의 형태를 규정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대화는 하나의 명확한 결론으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 결론이 보이지 않자 그는 불안해했습니다. 계속해서 묻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정확히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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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단순히 제자의 독해력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교육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불안의 징후입니다. 제자는 질문보다 답을, 과정보다 결과를, 탐구보다 확정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AI시대에 들어서며 더욱 증폭됩니다. 검색창에 질문을 입력하면 0.3초 만에 수백만 개의 답이 쏟아지고, 생성형 AI는 어떤 질문에도 즉각적이고 그럴듯한 답변을 제공합니다. 정보는 넘치지만, 역설적으로 확신은 사라집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답이 옳은지,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 이 근원적 물음 앞에서 우리는 더욱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해력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대체불가능한 세계관은, 이 불안을 성급하게 해소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 속에서 견디는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1817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Negative Capability)"라고 명명했습니다. "사실과 이성에 조급하게 손을 뻗지 않고서도 불확실성과 신비, 의심 속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키츠가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시인에게서 발견한 본질적 자질이었습니다. '사고(思考)'의 효율성을 넘어 '사유(思惟)'의 깊이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깊은 사유는 종종 명확한 답이 없는 질문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 역시 수많은 불확실성과 의심으로 가득합니다. 타인의 목소리에 조급하게 손을 뻗지 않고, 자신의 경험 속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사유하기: 릴케의 질문 사랑법


프란츠 카푸스는 자신의 시에 재능이 있는지, 시인으로서의 길을 계속 가야 할지 등 깊은 불안과 질문을 안고 릴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릴케는 이 청년에게 직접적인 '답'이나 '판단'을 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삶과 예술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조언합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청년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지금 당장 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답은 당신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질문들을 사랑하십시오." 릴케가 말하는 '질문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답을 유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질문 그 자체를 하나의 거주 공간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집에서 사는 것처럼, 확정되지 않은 의미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답은 책이나 타인의 조언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경험과 삶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릴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불확실성, 미해결의 상태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 상태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는 현대 교육이 요구하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질문보다 답을 가르칩니다. 시험은 정해진 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재생산하는가를 측정합니다. 문해력 평가조차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시오"라는 형태로 제시되며, 마치 텍스트에는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내재되어 있고 우리의 과제는 그것을 발굴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릴케가, 그리고 키츠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정반대입니다. 위대한 텍스트는 확정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의미 생산자가 됩니다.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역시 불확정성의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각각의 도시 - 자이라, 이사우라, 디오미라, 조에 - 는 실재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기억의 도시이자 욕망의 도시이며, 기호의 도시입니다. 어떤 도시는 죽은 자들의 도시이고, 어떤 도시는 욕망의 도시이며, 어떤 도시는 연속적이지만 동시에 비연속적입니다. 쿠빌라이 칸은 이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의 제국을 이해하려 하지만, 55개의 도시 이야기가 끝나도 그는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대신 그는 질문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웁니다. 모든 도시는 베네치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어떤 도시도 베네치아가 아닐 수 있다는 역설을 받아들입니다.



"선생님, 그래서 정답이 뭐예요?"라며 매번 답을 먼저 물었던 제자에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책이 훌륭한 이유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칼비노가 '도시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하나의 정의를 내렸다면, 우리는 그걸 외우고 시험 보고 잊어버렸을 거야. 하지만 그는 55개의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를 주면서 '너는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고 있어.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사람마다 다른 도시를 보게 돼. 그게 이 책이 100년 후에도 읽힐 이유고, 네가 20년 후에 다시 읽으면 완전히 다른 책이 될 이유야."



문제설정의 우위: 들뢰즈와 진정한 사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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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문제는 해답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단순히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다는 수사가 아닙니다. 들뢰즈에게 문제는 그 자체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집니다. 들뢰즈는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이 '진리'나 '개념'을 미리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문제'를 단지 그 진리를 찾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여겼다고 비판합니다. 들뢰즈에게 '문제'는 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자체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답을 기다리는 불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사유의 형식입니다. 좋은 문제는 여러 개의 해답을 낳을 수 있지만, 나쁜 해답은 문제 자체를 왜곡하거나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학생들에게 이미 잘 정립된 문제를 주고 그에 대한 해답만 요구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수학 시험을 생각해보십시오. 문제는 이미 완벽하게 정식화되어 있고, 학생의 과제는 그것을 푸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리고 진정한 학문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고 정식화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고, 그것을 해결할 시간이 한 시간뿐이라면, 나는 처음 55분을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올바른 질문을 찾으면, 답은 5분이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이 통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생성형 AI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AI는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입력한 프롬프트, 즉 이미 정식화된 질문에 대해서만 응답합니다. 따라서 AI 시대의 대체불가능성은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묻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어떤 문제가 진정으로 탐구할 가치가 있는가, 표면적 질문 뒤에 숨은 더 근본적인 물음은 무엇인가? 이것을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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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에서 제자들과 우르슬라 르귄의 SF 소설 『빼앗긴 자들』을 읽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 행성 우라스와 아나키즘 행성 아나레스를 대비시키며, 어느 체제가 더 나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학생은 "그럼 작가는 아나키즘이 답이라고 말하는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토론을 진행하면서 발견한 것은, 르귄이 제시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더 복잡한 질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완전한 개인주의는 무엇을 잃는가? 완전한 집단주의는 무엇을 억압하는가?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이상적 사회를 꿈꾸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인간이 어떤 사회 시스템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며, 진정한 '자유'와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수작입니다.


토론이 끝날 무렵, 그 학생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르귄은 답을 주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질문들과 계속 씨름하길 바라는 것 같아요. 쉬운 답을 선택하지 말고." 바로 그 순간, 그 학생은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를 실천한 것입니다. 명확한 결론으로 도피하는 대신, 복잡성과 모순을 견디며, 질문의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사유의 무게 견디기: 아렌트와 판단의 용기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분석하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악한 의도가 아니라 사유의 부재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어진 명령을 따랐고, 통념을 받아들였으며, "모두가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행동했습니다. 아렌트에게 사유란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확립된 규칙과 범주를 의심하고, 불편한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며, 쉬운 답을 거부하는 능력입니다.

아렌트는 사유하는 사람을 "내면의 대화자"라고 묘사합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며, 그 대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질문자가 되고 답변자가 됩니다. 이 대화는 결코 완결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답은 또 다른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다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끝없는 내적 대화를 견디는 것, 확정된 결론 없이도 사유를 지속하는 것 -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러한 사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은 빨라야 하고, 명확해야 하며, 측정 가능해야 합니다. "복잡하다"는 말은 "비효율적이다"와 동의어가 되었고, "모르겠다"는 무능의 고백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집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빠른 답을 요구하고, 부모는 자녀가 "확실한" 진로를 선택하기를 바라며, 입시 제도는 모든 학생을 단일한 척도로 서열화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들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정답을 모를 때 무작위로라도 찍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여러 관점이 동시에 타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친구거나 적이거나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집니다.


북클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모르겠어요"를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한 고등학생 제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이 소설이 뭘 말하려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램지 부인의 생각이 계속 흘러가는데, 어떤 건 이해가 되고 어떤 건 잘 모르겠고... 근데 이상하게도 읽으면서 뭔가 느껴지긴 하거든요. 이게 정상인가요?"


『등대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작으로, 인물들의 내면세계, 생각, 감정, 인상 등이 논리적 순서 없이 파편적으로 흘러가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제자는 울프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독서 방식, 즉 '이성적 이해'를 넘어선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체험'을 정확히 경험한 것입니다. 『등대로』는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이 한 것은 단순한 독서 감상이 아닙니다. 그는 명확한 이해 없이도 텍스트와의 관계를 유지했고, 의미의 불확정성을 인정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정서적 반응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키츠가 말한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게 가장 정직하고 성숙한 독서야. 울프를 '이해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보다, '모르겠지만 느껴진다'고 말하는 네가 훨씬 더 깊이 읽은 거야."



야생의 사고와 미완의 지혜: 레비-스트로스의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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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서구 근대의 과학적 사고와 원시 부족의 신화적 사고를 대비시키면서, 후자를 "열등한" 사고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고로 재평가합니다. 과학적 사고가 추상과 일반화를 통해 보편 법칙을 추구한다면, 신화적 사고는 구체적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야생의 사고는 완결된 체계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배열되고, 새로운 요소를 통합하며, 모순을 포함한 채로 작동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브리콜뢰르(bricoleur)는 손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미리 정해진 설계도를 따르지 않으며, 재료의 원래 용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무엇을 만들지 미리 정확히 알 수 없고, 과정 중에 계속 변화할 수 있으며, "완성"이라는 것 자체가 잠정적입니다.


AI시대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정의된 문제, 명확한 데이터, 최적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정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완벽하게 정의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윤리적 딜레마, 창조적 작업, 자아 정체성 - 이러한 문제들은 명확한 입력값과 출력값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브리콜라주의 영역에 속합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파편적 경험들, 모순되는 감정들, 불완전한 이해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한 제자가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소설은 너무 어려워요. 시간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누가 말하는 건지도 헷갈리고, 빌러비드가 진짜 유령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도 이게 노예제를 다룬 다른 어떤 글보다 더 와닿아요. 왜일까요?"


이 학생의 질문에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모리슨은 의도적으로 명료성을 피합니다. 노예제의 트라우마는 선형적 서사로 담을 수 없고,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완결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파편적이고, 모호하며, 불안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불확정성 속에서 독자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감각을 체험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노예제는 나빴다"는 명확한 메시지로 단순화되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험의 복잡성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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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노예제라는 거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어떻게 개인의 기억을 파괴하고, 영혼을 지배하며, 현재의 삶까지 잠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빌러비드'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세서와 흑인 공동체가 억압했던 '기억'과 '트라우마'의 응축된 상징입니다. '빌러비드'가 정말 유령인지 아닌지 모호한 상태는 소설 전반에 걸친 불확실성을 상징합니다. 세서는 이 모호한 존재와 대면하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책을 명쾌하게 읽었다는 것은 거짓말에 가깝습니다.



실천으로서의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 불확실성 속에서 살기

그렇다면 부모와 교육자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를 길러줄 수 있을까요? 이는 단순히 "질문을 장려하라"거나 "정답을 강요하지 마라"와 같은 일반적 조언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불확실성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첫째, 부모 스스로가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왜 사람들은 전쟁을 해요?"라고 물을 때,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라는 쉬운 답으로 도피하지 마십시오. "그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야. 역사학자들도, 철학자들도 수천 년 동안 그 질문과 씨름해왔어. 함께 생각해볼래?"라고 응답하는 것이 더 정직하고 교육적입니다. 이러한 응답은 아이에게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모든 질문에 즉각적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함께 탐구할 기회다.


둘째, 여러 관점을 동시에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고 왔을 때, "누가 잘못했어?"라고 즉시 판단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네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였니? 친구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였을 것 같아? 선생님은 또 어떻게 봤을까? 만약 네가 관찰자였다면 뭘 봤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아이에게 상황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훈련을 시킵니다. 이것은 상대주의 - 모든 관점이 동등하게 옳다는 입장 - 와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판단하기 전에 복잡성을 충분히 파악하는 능력, 성급한 단순화를 거부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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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쉬운 이분법을 의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좋은 사람/나쁜 사람", "성공/실패", "승자/패자"와 같은 범주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편리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미묘함을 지웁니다. 북클럽다이브에서 우리는 종종 "양면 읽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 『해리 포터』에서 스네이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사랑, 죄책감, 헌신, 증오라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얽힌 인간 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는 인물이자, 독자들에게 '진실'과 '겉모습'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의 상징성을 분석하는 연습은 아이들에게 인간의 복잡성, 동기의 다층성, 판단의 어려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넷째, 급하게 답하지 않을 권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즉각적 반응을 요구합니다. SNS의 좋아요, 실시간 댓글, 즉석 투표. 그러나 진정한 사유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어떤 질문에 대해 "시간을 두고 생각해볼게요"라고 말할 때, 그것을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신중함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책을 읽고 즉시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두고 생각이 익도록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학습입니다.


다섯째, 과정 자체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를 탐색하는 과정을, 답을 찾는 것보다 질문을 정교화하는 과정을 중시하십시오. 한 학생이 환경 문제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처음에는 "플라스틱을 줄이자"는 단순한 주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면서 그는 점점 더 복잡한 질문들과 마주했습니다. 플라스틱 대체재의 환경 영향은? 개인의 실천과 구조적 변화의 관계는? 환경보호와 경제발전의 충돌은? 결국 그의 에세이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문제의 복잡성을 섬세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더 가치 있는 성취였습니다.



부모의 과제: 불안을 전가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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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역설적으로 부모의 불안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을 찾으려 합니다. 명문대, 안정적 직업, 예측 가능한 경로. 이러한 불안은 이해할 만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불확실성 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종종 아이에게서 가장 중요한 능력(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능력)을 빼앗습니다.


한 어머니가 상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의대를 가겠다고 했다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가, 이번엔 또 환경운동가가 꿈이래요.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우왕좌왕해서야..." 저는 물었습니다. "아이는 몇 살이죠?" "고등학교 1학년이요." "그럼 그게 정상 아닐까요? 16세에 평생의 진로를 확정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요?"


이 어머니의 불안은 자연스럽지만, 그 불안을 아이에게 전가하는 순간 문제가 됩니다. 아이는 탐색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해보고, 실패해보고, 방향을 바꿔볼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너무 빨리 확실성을 요구한다면, 아이는 진정한 자기 발견 없이 타인의 기대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길은, 설사 사회적으로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부모가 불안을 전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관심과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깊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나는 네가 지금 당장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스스로 질문하고, 탐색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기만의 길을 찾을 거라고 믿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필요하면 옆에 있을게." 이러한 태도는 아이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줍니다. 확정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완벽하게 계획된 미래가 없어도, 자신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와 AI 시대의 대체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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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핵심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AI 시대에 왜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가 대체불가능한 세계관을 만드는가?


첫째, AI는 확정된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지만, 불확정적 상황에서 판단하지 못합니다. AI는 명확한 목표 함수가 있을 때 최적화할 수 있지만, 목표 자체가 모호하거나 상충할 때, 또는 "최적화"라는 개념 자체가 적절하지 않을 때 무력합니다. 인간의 윤리적 판단, 예술적 선택, 관계적 결정은 대부분 이러한 불확정적 영역에 속합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모호성 속에서도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 AI는 기존 패턴을 학습하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혁신은 종종 "아직 물어지지 않은 질문"을 묻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키츠가 셰익스피어에게서 발견한 것처럼, 위대한 사유는 확립된 범주를 넘어서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 아직 답이 없는 영역, 아직 개념화되지 않은 경험,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에 열려 있게 합니다.


셋째, AI는 계산하지만 숙고하지 못합니다. 하이데거의 구분을 빌리면, AI는 '계산적 사유(calculative thinking)'는 할 수 있지만 '명상적 사유(meditative thinking)'는 할 수 없습니다. 계산적 사유는 주어진 목표를 위한 수단을 찾는 것이고, 명상적 사유는 목표 자체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 후자를 가능케 합니다. "이것이 옳은가?", "이것이 의미 있는가?", "다른 방식은 없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넷째, AI는 수렴하지만 발산하지 못합니다. AI는 주어진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아 하나의 답으로 수렴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사유는 종종 발산적입니다. 하나의 질문에서 열 개의 새로운 질문이 나오고, 하나의 관점에서 다섯 개의 다른 관점이 파생됩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 이러한 발산을 견딜 뿐 아니라 즐깁니다. 확정되지 않은 의미의 공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질문들과 함께 살기: 릴케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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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다시 가봅시다. "당신이 지금 답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그것들을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모든 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은 질문들을 살아내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먼 훗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으로 들어가 살게 될 것입니다."


"질문을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질문을 추상적 퍼즐이 아니라 실존적 과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한 번의 성찰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 관계, 실패와 성공을 통해 점진적으로 답해지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내 인생은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불확실성을 품고 삽니다. 이 질문을 살아내기 위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질문은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북클럽의 한 학생이 졸업하면서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북클럽에 처음 왔을 때 저는 모든 책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찾으려고 했어요. 선생님이 그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고, 저는 그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근데 지금은 알아요. 책에는 하나의 '진짜 의미' 같은 게 없다는 걸요. 대신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있고, 저는 제 삶을 살아가면서 그 질문들과 계속 대화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진짜 읽기인 것 같아요."


이 학생은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의 핵심을 이해했습니다. 문해력의 최종 목표는 텍스트의 '정답'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평생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0대에 읽은 책을 30대에 다시 읽으면 완전히 다른 책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이에 질문들을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했고, 우리의 질문도 변했으며, 따라서 텍스트에서 듣는 것도 변했습니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 단순한 기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자,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며, 타인과 관계 맺는 윤리입니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섣부른 판단으로 도피하지 않고, 타인의 복잡성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능력이 AI가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려 말했듯이, "지옥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쉽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위험하고 끊임없는 경계를 요구한다. 지옥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그것에 공간을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는 바로 이 두 번째 길입니다. 쉬운 답, 확실한 해결책, 단순한 범주화라는 지옥 한가운데서, 복잡성과 모순과 불확실성이라는 인간적인 것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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