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생각합니다. 칠흑같이 어둡고 집어삼킬 듯이 세찬 영금정의 밤 파도가 떠오를 때도 있고요. 해운대의 여름 바다는 머릿속에 그리는 순간부터 그립고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뒤, 힘을 쭉 빼고 해수면 위에 몸을 두둥실 맡겨 봅니다. 귓가에는 바닷물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계곡물 위에서도 누워봤지만, 누워 놀기엔 바다가 제격입니다. 파동이 있으니까요. 규칙적인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이런 게 명상인가, 합니다.
사는 게 지칠 때면 물속에 있는 상상을 합니다. 수영을 배웠던 학창 시절엔 숨을 꾹 참고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수영장 바닥에 앉았습니다. 뻑뻑한 수영모 위에 쓴 수경 너머로 정면을 직시합니다. 하늘색으로 칠한 수영장과 노란색 레일이 보입니다. 나만의 수영장에서 귀가 멍한 채로 잠시 앉아있으면 어느새 잠이 들곤 합니다. 다이빙을 배웠던 20대엔 시야가 어두운 심해로 갔습니다. 바닷속에서 아름다운 걸 많이 봤지만, 제가 만들어내는 바다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호흡기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만이 가득합니다. 규칙적인 숨소리에 집중합니다. 제 숨소리도 길어집니다. 서핑을 배운 30대엔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름 나라의 햇살이 그리울 때면 서핑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기다리던 때로 돌아갑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뙤약볕과 대조되는 선선한 바람 소리, 릴렉스하라던 선생님의 말소리. 경직된 제 몸과 마음도 조금은 풀어집니다. 지난겨울에는 밤마다 인스타그램에서 서핑 영상을 봤습니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보드와 한 몸이 된 서퍼를 보며, 다음 생에는 하와이안 서퍼로 태어나고 싶어, 읊조립니다.
김찬송의 그림도 인스타그램으로 만났습니다. 100호쯤 되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머리카락을 넘기는 한 여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감을 흘러내리듯 표현한 붓칠이 독특해 클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 위까지 드러난 몸에는 옷도 액세서리도 없었고, 배경엔 하늘색과 초록색이 칠해져 있기에 여름 나라 그림이라 확신했습니다. 갤러리와 작가의 피드를 둘러보니 전시명은 <The Blue Hour>, 갤러리의 유리문과 유리창 너머로 초록 풀잎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여름 전시였습니다.
전시장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둘러봅니다. 한 사람의 옆모습, 눈, 손, 발, 혹은 등 그리고 여름 색채로만 이루어진 작은 추상화들이 잘 배치된 전시입니다. 분절된 것을 연결해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얼굴 너머에 바다를 찾는 저를 투영해봅니다. 많은 것이 생략되었기에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위로받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오브제도 이파리, 마사지볼, 연필, 화분,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들입니다. 이 또한 흘러가리라, 그림이 이야기합니다. 작가의 초기 작품도 찾아봤습니다. 지금은 상반신만 그린다면 예전엔 전신을, 지금은 자연을 그린다면 예전엔 원목 가구와 가죽 소파를 그렸습니다. 오늘의 김찬송이 좋습니다. 더 많이 상상할 수 있는 쪽에, 켜켜이 쌓이기보단 사라지는 쪽에 마음이 기웁니다.
겨울이 되어서야 실제로 그림을 보았습니다. 작은 갤러리에서 하는 그룹전이었습니다. 김찬송의 그림은 8점뿐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어쩌면 울고 있을 여자와 연못 같은 풍경 그리고 웅크린 몸과 그러잡은 손. 턱을 괸 여자와 글을 쓰는 손과 작은 공이 올려진 발 그리고 아마도 연못. 저는 또 제멋대로 지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동질감을 느낍니다. 여름 그림이라 생각했는데 겨울 그림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계절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이따금 김찬송의 그림을 열어봅니다. 그럴 때면 입을 앙다물고 있다가도 자연스레 힘을 풀게 됩니다. 작가는 지금 카사블랑카에 있습니다. 이제는 하늘도 담기 시작했더군요. 카사블랑카는 제가 밤 수영의 매력을 알게 된 곳입니다. 열흘간의 단체생활에 지쳐갈 즈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회복했지요. 김찬송 작가의 다음 그림이 기다려집니다. 또 다른 안식처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