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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Oct 18. 2023

두번째 사랑이 찾아와버렸다

#에필로그


이번 에세이를 기획하던 날을 기억한다. 어느 아침이었고, 당시 나는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가벼운 여행 에세이를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도저히 무거운 종류의 책을 읽어낼 수 없는 상태였다. 문자를 읽고 있어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해석해낼 수 없는 상태. 괜히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때 나는 많은 일들을 벌여 놓았었다. 하루가 24시간으로도 모자랐던 것 같다. 무엇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그런 시간들을 보냈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사람을 만났다. 나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힘들 때면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퍼즐을 풀듯이 하나씩 해결해가는 사람. 그건 나를 성장시키고 마음을 단련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결국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그래왔다.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되려 나를 죄어오기 시작했다. 여름 동안 나는 고장난 기계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미끄러졌다. 무엇보다 지쳐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밝은 척, 힘들지 않은 척 하려는 내 모습에도 나는 점점 질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힘들다는 이유로 괜히 엄한 사람들을 괴롭혀댔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자고 졸라댔고, 때로는 ‘나만 진심이었다’라는 말을 무기로 각자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멋대로 훔치려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남는 것은 공허함. 해가 질 때마다, 잠이 될 때마다 서늘함을 느꼈다. 금방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일들은 본질을 빗겨가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맛있는 것을 먹거나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주로 홀로 오래 걷는다. 벅찬 마음을 누르기 위해 많은 시간을 걷는데 할애한다. 걷는 동안 생각한다. 오늘 내 마음이 어땠는지. 지금 나는 얼만큼 괜찮아지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고, 나아갈 수 있을지.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한참을 흘러 있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내 방 책상 앞에 앉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들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거나 방 안을 헤집으며 청소를 하거나, 버릴 물건들을 골라 내기도 한다.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정리할 수 있을지는 자주 생각해본다. 그렇게 나를 이해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나’라는 사람이 한결같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닫는다. 그리고 무수한 계절에 만났던 사람들 역시 한결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제의 그가, 내일의 그와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이젠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확신이 생겼다.


  여행은 언제나 나를 변화시킨다. 매순간 ‘시간’과 ‘방향’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나는 자주 선택을 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할 수 없어서 때로는 두려울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는 일. 그렇지만 그렇게 나아가는 길이 싫지만은 않다. 어쩌면 여행은 ‘사랑’을 경험하는 일과 같지 않을까? 어느쪽으로 가든 실패는 하지 않을 테니까. 첫사랑도, 짝사랑도, 그 무엇도 결국엔 다음 여행지를 위한 티켓이 되어 남을 테니까.


  이렇게 나는 지난 시간 동안 내게 있었던 짧고 깊은 여행을 마친다. 진심을 다해 써내려갔던 10편의 기록 외에도 이곳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더 많은 여행지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들렸던 곳 중,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어느 동네에서 들렀던 책방이 기억난다. 그곳에서 나를 위로하듯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던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끝내 그건 나와 그녀만의 비밀로 묻으려 한다.


  지금 내 손엔 새로운 티켓이 들려 있다. 언제 떠날 수 있을지, 어디로 떠나면 되는 것인지 ‘시간’도 ‘방향’도 알 수 없는 한 장의 티켓. 새하얗고 매끄럽게 코팅된 뻣뻣한 티켓의 감촉을 느껴본다. 고소한 잉크의 향내를 맡아 본다. 이젠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의 다음 여행이 궁금한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나의 다음 여행이 설렘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당신의 여행 또한 이상하고 아름답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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