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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치 Jul 11. 2019

더 인간적인 말

정영수

                                                                                                                                              

제 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더 인간적인 말>




1. 선택의 자유


삶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 주체이다.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택의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행동하려 애썼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힌다. 죽음까지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살도 존중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연결이 될까 봐 겁이 난다. 안락사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결론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덤덤히 안락사를 진행하는 주인공의 이모를 보면서 내 마음은 더 어려워졌다. 그런 이모가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해야 하며, 왜 하필 지금이냐는 주인공의 설움 섞인 질문에 이모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야.” 주인공처럼 나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내가 저 죽음 앞에서도 흔쾌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죽음은 부부를 이혼 직전까지 끌어오게 했던 연역법, 귀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부부는 이혼상담사에게 “저희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라고 했지만 둘은 현실이 아닌 이론과 상상만을 이야기해왔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엔 논리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걸 알면서도 이모를 보내줬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2. 형태 없이 흘러가는


“모든 관계는 유기적이며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변화는 늘 두렵다. 때로는 익숙한 것에 권태로움을 느끼면서도 새로움엔 겁이 난다. 하지만 삶은 그런 내 마음을 가뿐히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변한다. 굳건히 있을 것만 같았던 것도 변하고 떠나간다.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들도 굳이 내 앞을 마주한다. 그래서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말이 노래 가사로도 나왔나 싶다. 이 책에서 백개먼을 소재로 삼은 것은 앞을 알 수 없는 삶을 말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갖은 수단을 썼지만 가진 돈을 모두 잃은 동료와 동료의 실패로 인해 부자가 되어버린 이모의 이야기는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경우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덤덤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영원함을 바라는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가 보다. 오늘도 형태 없는 물과 같은 삶에 유리컵을 놓고 싶어 안달 난다. 






3. 언젠 가에.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 그렇다면 우리가 새 물건을 그만 사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지금 사는 물건이 헌 것이 되는 걸 내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얼마나 나이가 들었을 때일까, 그때가 되면 더는 새 물건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진 헌 물건들이 모두 나만큼 낡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것인가, 그럼 내 낡은 몸이 온통 낡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가, 하는 생각들을 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을 때 그곳에 있는 ‘나’만 상상해왔다. 주변의 물건, 환경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장기간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물품을 제외한 소비는 최대한 지양했다. 음식은 상하게 될 것이고 물건들은 당분간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남아있는 것들을 정리해나가기 바빴다. 나에게 마지막이 다가온다면 여행준비와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말처럼 새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낡은 것들 또한 정리해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텅 비어있는 곳에 조용히 눈을 감는 것, 내가 상상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했다. 주변인들의 죽음과 내가 마주할 죽음은 때때로 울컥하게 한다. 끝이라는 생각은 지금의 나를 환기해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생각의 끝은 그럼 오늘 잘 살아내 보자 이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어느 순간을 위해 표현하고 감사해 하고 사랑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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