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내 마을의 이방인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됐어 “ 아빠의 간결한 소개는 많은 설명과 수식이 생략되어 있다.
낯선 여인을 두고 오며 가며 드나드는 주민분들은 생경한 것을 보는 듯 물었다.
“누구나..? 오 그래 딸이라고? 둘째나 셋째나”
나는 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을의 젊은이가 되었다. 물론 아빠의 생략된 소개 덕분이다. 강원도 산골 어르신들의 말씀은 그리 길지 않다. 박씨네 셋째 딸이라고 하면 원래 제자리에 있었던 모양으로 그냥 그런 것이 나타났는가 보다 허허 웃으며 넘어간다. 뻘쭘한 통성명도 생략이다. ‘ㅇㅇ네‘는 만사 능통한 명함이 된다.
나는 현재 아빠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의 동해안 산자락 깊은 곳 도리내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다. 도리내는 석회암 지대에서 만들어지는 자연적인 함몰지 카르스트 지형 ‘돌리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지리를 증명하듯 마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시멘트 공장의 채석 광산을 지나야 한다. 1차 관문을 통과하면 군데군데 산 아래 평지에 집이 모여있고 지금은 모두 말라버린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작은 육교를 건넌다. 여름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듬성듬성 피어 있고 가을에는 감나무가 지천이다. 본격적으로 도리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심호흡이 필요하다. 비장하게 기어를 변경하고 힘껏 액셀을 밟지 않으면 가팔라지는 경사를 넘어가는데 가속을 받지 못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것들이 작아 보일 때쯤 해발 400m 아래로 바다가 걸려있다. 밤이 되면 동동 뜬 오징어 집어등의 불빛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 길라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어부오와’라는 명패를 발견한다면 험난한 산길을 잘 도착한 것이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끄트머리와 입구를 기준으로 3개의 반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자리한 3반 깊숙한 곳에 우리 가족의 집이 있다.
정확히는 4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방랑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이 서른 코비드에 무작정 떠난 해외였다. 19살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떠난 고향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서울에서 20대를 보냈고, 30살이 되어서는 요리가 하고 싶었다. 딱 1년만 마음껏 살아보겠노라 띄었던 발은 3년을 붙였다. ‘내가 스페인 땅을 밟다니..’ 다른 땅을 밟는 타지의 삶에 대한 환상에 반짝 불이 켜졌다. 정식으로 머물 첫 집을 구한 것도 3년 전 4월이었다. 그때 하나둘씩 짐을 풀면서 집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홀연히 이 땅에 나타났으니, 돌아갈 때도 떠나고 싶을 때 말없이 바람처럼 떠나고 싶어.‘ 그 무렵만 해도 정확히 언제 떠나게 되고 싶은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르셀로나가 가장 예쁘던 올해 봄일지도 더욱이 알 수 없었다.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간혹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 때가 있다. 동해는 어렸을 때는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20대 중반부터는 염증을 느낄 때마다 돌아오고 싶은 품이었다. 20대 후반에 잠깐 지중해가 돌진해 끼어들었을 뿐이다. 나는 언제고 다시 이 동해바다로 돌아오고 싶었다.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나부꼈다.
마지막 해를 보내던 여름 순수하게 사랑했던 스페인의 남자와 이별을 했다. 그것이 귀향의 마음에 도화선이 된 것은 아니다. 그 해엔 바르셀로나에서 유일한 2 스타 레스토랑에서 신임받는 셰프로 일하고 있었다. 이별에 내어줄 시간도 부족했다. 조리 쪽에서는 아무 경력이 없었지만 단기간에 승진을 하고 취업 비자 연장 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셰프님은 나와 함께 강력한 팀을 만들고 싶어 했다. 큰 걱정이랄 게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3 스타로 전진하는 것 그를 위해 같은 꿈이 깨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무엇보다 허기졌다. 내 마음 깊숙이 진정 3 스타라는 타이틀을 쥐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수셰프는 매일 같이 말했다.
“소피, 3 스타 셰프가 되는 거야. 진짜 멋지지 않겠어? 상상해 봐. 그러니 넌 그만두지 말아야 해. 같이 오래 일하자고. 그건 내 꿈이거든”
“당신의 꿈이에요? 3 스타가 되면 어떨까요?”
“글쎄, 우린 세계 여행을 다니겠지. 그리고 일하겠다는 똑똑한 사람이 줄을 서겠지. 그럼 너도 저 멍청한 인턴들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농장을 사서 그린 스타에 도전해 볼까도 해. 가끔 수확도 하러 가고 말이야. 내 꿈은 3 스타 오직 하나야. “
사실 나는 그와 함께 걷고 싶다는 마음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람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내리꽂아 버리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두 손 두 발을 들고 주방을 나가버린 직원만 해도 열 손가락은 족히 넘었다. 나는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해 갈비뼈가 보일 만큼 말라 있었고, 하수구에 시커멓게 엉킨 머리카락 뭉치를 빼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다. 꿈을 꾸는 사람들 곁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내게는 꿈이었던 시절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전투적인 주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웃음이 무언가를 삼켜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느낌. 반쪽짜리 아모르가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면, 이유는 분명했다. 그건 내 뿌리였다.
나는 단단히 태어난 곳에 내리지 못하고 떠나버린 홀씨 같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려 다니는 이방인. 홀씨도 발이 붙고 싹이 트면 민들레가 된다. 아무렴, 지금의 나는 민들레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계속해서 발을 붙일까 말까를 재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부끼는 나를 보며, 한국에 한 번만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마음이 바뀔 거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에야 한국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말했다.
“셰프님, 저는 엄마의 음식이 보고 싶어요. 당신이 할머니와 엄마의 음식에서 영감을 받는 것처럼, 저도 제 뿌리를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음식너머의 것을 보고 싶어요. 전 너무 빨리 달려왔어요.”
다시 짐을 쌌다. 떠날 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는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더 생겼을 뿐이다.
3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그대로인 듯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끊어진 3년의 시간이 30년처럼 지난하게 느껴졌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2층으로 올라가 이삿짐 상자에 쌓인 나의 옷가지와 잡화들을 풀어헤치며 봉인된 시간들을 꺼냈다. 오래된 책상, 주워온 의자, 고장 난 시계들을 내던지고 쓸고 닦았다. 2층의 시간은 누렇게 바래 붙박인 2012년의 달력과 함께 멈추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생 1학년이 될 무렵이다. 부모님을 따라 주말이면 이 도리 내의 집에 왔다. 아버지는 당시 운전직 공무원이었다. 엄마는 구내식당을 운영하셨고 주말이면 말 그대로 주말 농장처럼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슴을 키웠다. 그렇게 농사를 지은 식재료는 공무원들의 점심상에 오르고 우리들의 밥상에 올랐다. 중 고등학교를 가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버리면서 내가 도리 내에 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2층은 천천히 가족들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당시 학교에서나 쓰던 가장 좋은 재질의 마룻바닥과 비싼 새시로 꾸몄다고 했다. 구멍 난 방충망과 뜯겨나간 노란 장미 무늬 벽지에 에메랄드 페인트 문까지 난해한 조합들은 하나같이 내 취향에서 벗어났다.
자그마치 10여 년의 묵은 세월의 때들을 벗기고 나서 내가 머물 방이 생겼다. 서울의 전셋집에 살 때처럼 집주인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내가 배고플 때 요리를 해야 할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룸메이트도 없다. 두둑이 밥을 먹고 밭일을 하러 나가는 아빠를 따라나섰다. 대파의 모종을 받아 들고 나니 가냘픈 줄기가 영 어색하기만 했다. 흙 속에 이리저리 얽힌 뿌리들의 힘이 꽤 대단했다. 아빠는 내게 대파 심는 법을 알려줬다.
먼저 호미로 깊게 골을 파내고 대파의 줄기를 2개씩 띄워 가지런히 눕힌다. 그리고 그대로 흙을 가볍게 묻어둔다. 흠뻑 물을 주고 나면 끝이다.
나의 첫 뿌리내리기였다. 그렇게 2025년 4월의 봄, 나의 산골 귀향살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