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선물한 낭만으로
'손민수 하다'라는 말이 있다.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에 등장하는 '손민수'라는 등장인물이 주인공의 옷, 헤어 스타일, 액세서리, 행동 등을 그대로 따라 하는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말인데 주로 '누군가를 따라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올해 겨울 I가 새 싱글 곡을 발매했다. 겨울 느낌 물씬 나는 곡과 함께 비주얼라이저(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된 순간, 어딘가 익숙한 풍경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리는 풍경 한가운데에 I가 서 있고 그 뒤로 어디선가 많이 본 전철이 지나가는 장면뿐만 아니라, I가 걷는 눈길 뒤로 일본어 간판이 보이는 게 아닌가. ‘대체 그 바쁜 스케줄 중 언제 일본에 다녀간 거야?’하는 의문을 뒤로하고,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촬영지가 어디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작년에 찍은 게 아닌 이상 전후 시기에 일본에 눈이 내리는 지역은 한정적이었고, 영상에 특정 건물의 간판이 찍혀있던 터라 검색해 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삿포로였다. 삿포로에서 오타루 부근까지의 홋카이도였던 것이다. 이미 한 번 가 본 곳이기도 했고, 마침 회사 일도 조금은 여유로워진 시기라 여행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함께 갈 친구도, 일정도, 여행에서 가 볼 곳들도 어느 것 하나 막히는 부분 없이 그렇게 I의 비주얼라이저에 담긴 촬영 스팟들을 따라 여행할 나의 첫 ‘손민수 여행’이 첫 삽을 뜬 것이다. 태생이 J 형 인간인 내 인생에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은 처음이라 여전히 저 순간이 신기하긴 하지만.
I의 곡만큼이나 I의 말들을 좋아하는 나는 I의 인터뷰나 I가 출연하는 라디오, 토크쇼 같은 것들을 꼭 챙겨본다. 어떤 감정선으로 곡을 쓰게 됐는지,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새로이 좋아진 것들이 있는지, 어떨 때 힘이 들고, 어떻게 에너지를 채우는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때의 I와, I가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좋아서.
컴백이 좋은 이유는 이런 스케줄들이 많아지기 때문인데, 이 싱글 앨범 발매 때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스케줄이 하나둘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중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 I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미리 남길 수 있도록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려뒀기에 댓글을 남겼다.
I 덕분에 삿포로행 비행기를 끊었어요
혹시 이번 촬영에서 팬들이 '여긴 꼭 가봤으면 좋겠다!' 하는 곳이 있었을까요?
I가 사랑한 겨울의 삿포로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사실 라디오 사연이나 댓글, 문자를 웬만하면 남기는 편인데 내 것이 뽑힐 거라는 생각보다 (물론 선정되면 럭키-라고 생각은 하지만) 새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때그때 궁금했던 것들을 남기곤 했다. 이번에도 여러 라디오에 싱글 작업에 관련된 내용이나, 곡 비하인드 같은 것들에 대한 질문을 남겨오다 이 여행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다른 결의 질문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질문만큼은 꼭 선정되어 I의 답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나에게는 충분히 특별한 여행이지만 최애가 추천하는 여행 스팟이 추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할 테니까.
내가 질문을 남긴 그 라디오 방송 당일, 다른 일로 인해 라이브로 청취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핸드폰 알림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덕메 (덕질 메이트) 들이 내 댓글이 읽혔다며 부리나케 달려와 준 것이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 잠시 숨을 고르고 라디오가 끝난 뒤 천천히 다시 듣기를 재생했다.
오타루 쪽이었거든요.
거기에 오르골을 파는 가게가 있어요.
그 가게의 무드가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와 속도로 내 질문에 답해주는 I를 보고 있자니 처음엔 이게 꿈인가 얼떨떨한 마음에 멍하니 있다가 얼른 I가 추천해 준 곳을 여행 계획에 추가했다. 지난 삿포로 여행 때 이미 다녀온 곳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I가 답해 준 순간부터 그곳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공간이 되어버렸으니까.
무언가를 좋아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순간들이 생긴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어쩐지 다른 시간들보다 반짝이는 것 같은 순간들, 언젠가 얘기했던 문장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 같은 것들처럼. 그리고 그저 과거의 도피처로만 남았을 수도 있었을 여행지가 I를 통해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귓가에 울리는 음악이 있는, 겨울이 되면 다시 그 선율을 따라 흔적을 되짚고 싶은 곳이 된 순간처럼 말이다.
그렇게 다시 가게 된 곳, I가 무드가 좋은 것 같다고 했던 오타루 오르골당은 지난 여행 때보다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I가 라디오에서 이곳을 추천했을 때 DJ가 “낭만적인 곳일 것 같아요”라고 했었는데 두 번째로 만난 이곳은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곳에서 낭만을 찾은 건 I를 통해 변한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변함없이 불안하게 삐걱거렸고, 여러 곡들이 섞여 들려오는 오르골 소리는 여전히 조금은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정리된 듯 어지러운 매대와 가게 안은 그때도 지금도 여유로울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
그렇지만 들어서자마자 지난번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보라색 장미가 든 오르골을 발견했을 때엔 괜히 반가웠고, 끝내는 없었기에 빈 손으로 나왔지만 재즈 곡이 담긴 오르골을 찾으려 이 곡 저 곡 들어본 시간은 여러모로 행복했다. 그러다 어떤 인형을 보고는 그룹 X의 어떤 멤버와 닮았다며 저항 없이 웃기도 했으니. 그러니 크게 변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I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고, 순간의 행복을 얻고, 평소보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으로 보다 많은 감정들을 느끼며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공간이 어떻게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공간과 순간을 선물해 준 나의 낭만에게, 고마웠고 여전히 고맙다는 인사를 - 언젠가 I가 전한 편지의 제목으로부터.
I와 그룹 X덕에 나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고 하곤 했지만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 이외에도 어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 또한 다른 의미로 나의 세상이 한 뼘 넓어지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이번엔 내가 한 뼘 더 자라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완벽히 좋기만 했던 순간이 아닐지라도 어떤 계기를 통해 좋은 기억을 덧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렇게 좋은 기억을 덧입히다 보면 마침내 좋은 순간이 되어 나의 일부로 남는다는 경험도 했으니까.
이렇게 I와 그룹 X를 통해 어떤 좋은 경험을 할 때면 어디선가 읽었던 내가 사랑한 것들이 나의 내일이 된다고 말하던 글이 떠오른다. 이 시간들이 좋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쌓여가는 날들 속에 기다려지는 나의 내일이 있다는 것, 그렇게 만들어지는 나의 내일들은 어제보다 조금 더 자라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는 아직 이들이 나의 내일에도 자리 잡아 주기를 바란다.
지금처럼 우리의 속도와 방향으로, 종종 되짚어보고 싶을 좋은 흔적들을 남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