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Nov 01. 2023

#1 취향이 같다는 것은

'덕통사고'의 다른 말 :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시작하기 전에


 글쓴이는 아주 평범하게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대로 일본에서 취직하여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20대 후반의 사회인이다. 아니,이었다. 과거형이 된 이유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나를 정의하는 또 다른 단어가 운석처럼 쿵하고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벼락 맞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이 '덕질일기'를 쓰는 이유는 간단하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20대 후반이라는 시점에 내 인생에 커다란 변화와 여러 가지 깨달음을 준 나의 '첫 번째 덕질'에 대해 기록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로는 이 글이 조금이나마 '아이돌 덕질'의 명암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이다. 물론 나의 뒤늦은 덕질을 이해하고 응원해 주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또한.


 최대한 객관적으로 써 내려가려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아무래도 ‘덕질‘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일방적인 애정을 기반으로 성립되어 감정에 끌려다니는 기형적 취미이다 보니 글쓴이의 논조도 흔들릴 수 있다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덕질에 대한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 이어지는 글에서 필요에 따라 등장하는 그룹명과 멤버 이름은 모두 이니셜로 대신한다. 대상이 누군지 숨기려 한다기보다는, 이 글의 나의 덕질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덕질에까지 스며들길 바라며.




'머글'의 삶


 9n 년생인 글쓴이는, 요즘 흔히 말하는 2세대 아이돌의 시기에 아이돌에 눈을 떴다. 2세대 아이돌이란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아이돌 그룹들을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샤이니, 소녀시대 등이 이 2세대 아이돌에 속한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그 당시 내가 느낀 아이돌이라 함은 말 그대로 '우상',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였다. 그때에는 음악적 성취 같은 것들 보다는 아무래도 '얼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수려한 외모에 관심을 먼저 갖게 됐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예쁘고 잘생긴, 그러니까 이목구비의 배열이 조화로운 아름다운 피사체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사춘기를 지나가는 10대 여자애가 친구들과 공부 이외에 나눌 이야기 주제라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돌이란 '소녀들의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시작해서인지 아이돌은 그때의 나에게 큰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의 노래와 그들의 무대는 여전히 내 심장을 뛰게 하고, 20대 후반이 된 지금에서도 노래방에서 꼭 부르는 노래들 중에는 그들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지만 흔히 말하는 '덕질'의 단계까지 나를 데려다 놓지는 못했다. 지금처럼 유튜브, 인스타그램, 위버스 등 아티스트와 소통할 수 있는 SNS 채널이 활발하지 못해 콘텐츠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뿐더러,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해야만 했던 편이라 (핑계지만) 시간도 없어서 흔히 말하는 '떡밥'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던 게 이유였을까. 지금처럼 연예인을 보려면 바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보니 '얼굴' 이외의 매력, 즉 입덕 포인트를 찾기도 힘들었고, 대한민국 사교육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어린 나의 치열한 현생 또한 그것에 한몫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대중음악 자체를 매우 사랑하게 된 나는 어찌어찌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꼽으라면 꼽을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그 그룹의 앨범을 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내 미키마우스 모양을 한 MP3 플레이어에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돌보다는 성시경, 거미, SG 워너비 같은 발라드 가수들의 지분이 늘어만 갔다. 그렇게 2세대 아이돌을 지나 4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올 때까지 나는 흔히 말하는 잡식성 리스너, 즉 '머글 (덕후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할 수 있겠다. 친구들이 말하는 모든 아이돌 그룹을 알고 그들의 곡도 거의 다 알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머글.




덕통사고는 재즈로부터


 그렇게 머글의 삶을 살다 20대 중반쯤 나의 마음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재즈'였다. 갑자기 아이돌 이야기로 잘 나가다가 웬 재즈? 그렇지만 그랬다. 여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일본은 아날로그적 취미의 세계가 매우 넓고 깊은 나라인데,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이닐이었다. 쉬는 날에는 레코드샵에서 좋아하는 재즈 바이닐을 찾아 몇 시간씩 디깅을 하고, 그러다가 새로운 바이닐도 한 번 사 보고. 무엇보다 트랙을 건너뛰는 번거로움이 있는 바이닐이기에 반강제적으로 첫 트랙에서 마지막 트랙까지 쭉 듣다 그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느꼈을 때의 희열에 빠져 지금도 여전히 바이닐과 함께 살고 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턴테이블은 열심히 돌아가는 중이다.)


 여기서 이 '사고'의 시작은 어김없이 갖고 싶던 바이닐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던 어느 평범한 하루에서 출발한다. 검색 페이지를 넘기다 우연히 누군가의 나무위키를 보게 되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가 재즈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아티스트와 그 곡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나 비슷했다. 재즈, 낭만, 향수, 위스키, 거기에 좋아하는 색까지. 게다가 언젠가는 재즈 음악으로 구성된 앨범을 내고 싶다는 포부라니 대체 누가 이렇게 멋지고 기특한 취향을 가진 거야, 하고 타이틀로 올라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보고 있는 게 케이팝 아이돌의 페이지였어?


 말도 안 돼- 심지어 알고 있던 그룹 X의 멤버 I였다.

 '이 그룹에 이런 멤버가 있었다고?'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는 이 그룹은 힙합 베이스의 신나고 센 음악을 하는 이미지였는데 갑자기 그 안에 재즈를 좋아하는 멤버라니. 아무튼 이 그룹의 색에 케이팝 신 (scene)에서 듣기 힘든 '재즈'라는 단어를 얹기에는 내 이해가 너무나 얕았고, 그 얄팍한 지식으로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물음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우선 I의 솔로 앨범부터 천천히 들어봐야겠다 싶어 그 첫 곡을 재생했는데 이게 웬 걸, 정신 차려보니 이미 모든 곡이 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룹 X가 해오던 결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 너무나 취향인 목소리, 완벽히 재즈라고 할 수 없지만 앨범을 관통하는 음악의 흐름과 그 메시지에 희열을 느꼈다는 점에서 나에게 같은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덕통사고
뜻밖에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 갑자기 어떤 대상에 몹시 집중하거나 집착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거기서부터 나를 집어삼킬 덤프트럭은 천천히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I의 솔로곡과 그룹 X의 음악들이 쌓여만 갔고, 출퇴근 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라이브 무대를 찾아봤다. 그다음은 각종 인터뷰. 그룹 X의 모든 멤버들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지만 아무래도 I의 말들이 나에게는 여러모로 크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을 곱씹고, 그가 가진 생각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사고'를 당했다. 낭만의 기준이 닮아있고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은 가끔 이다지도 잔인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덕질'은 어떻게 하는 거야?


 '덕통사고'를 당하고 입덕이라는 걸 하고 보니, 내가 알던 그 시절 아이돌 문화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트랙리스트를 가진 앨범은 왜 이렇게 다양한 형태와 버전으로 발매되는 것이며, 그놈의 포토카드는 대체 무엇이고 소화해야 할 콘텐츠는 왜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주변에 다른 그룹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고, 그들이 바쁘게 덕질하는 것도 지켜봐 왔지만 이게 내 일이 되고 나니 정말 천지개벽의 수준의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뭐라도 정보를 얻어보려 부랴부랴 트위터를 다운로드했다. 팬카페에도 가입했지만 등업이라는 거대한 숙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건 예전과 비슷해서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수년 전 데뷔를 한 그룹이라 내가 지나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와, 이걸 언제 다 봐?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든 것들이 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나 보다. 몇 달 전 어느 날 같이 점심을 먹던 동료가 '요즘 좋은 일 있으세요? 안색이 더 밝아졌는데?'라며 나도 눈치채지 못한 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고 생각을 해보니 근래 들어 스트레스를 길게 가지고 가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긴 했다. 거의 매일 쓰는 일기에도 눈에 띄게 좋은 일들에 대한 기록들이 늘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일상에서 흘러가는 일들에는 분명 큰 차이가 없었는데...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나는 내가 만난 새로운 세상이 내 일상에서 어떤 의미의 쉼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물론 몇 달이 지난 지금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230914 인스타그램 스토리_조금 지쳤던 어느 날에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덕후들은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도 특히 사랑을 양분으로 성장한다.

 덕질을 하는 대상에게서 받는 사랑과 기쁨 또한 아주 좋은 양분일 테지만, 그보다 내가 그 대상에게 쏟아내는 사랑이 어쩌면 나를 더 크게 자라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 잔인하고도 아름다울 나의 덕질일기는 I가 나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자 나의 특별한 성장에 대한 고찰이며, '사랑'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운 어떤 새로운 '사랑'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