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기에 위대했던 시간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스토너> 존 윌리엄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지점으로 가서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 종종 모임에서 나오곤 하는 질문이다. 내가 속한 모임의 연령대가 넓은 편은 아니니 과거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그 중 절반 정도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을 꼽는다. 나머지 절반 정도는 의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하곤 한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나에게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은 한마디로 좌충우돌의 시기였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닥치는대로 부딪히던 시간들. 다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저 그 시절을 실패의 시절. 좌충우돌의 시절로 놓아두고 싶다. 굳이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그때 그 선배의 말처럼 더 부딪히고 더 실패해볼걸. 그런 후회가 있다. 그후로 고작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놀이공원의 범퍼카처럼 돌진하던 시간들은 잊혀지고 평범한 삶을 살아버리고 있다. 밤마다 이불에 하이킥을 하게 만들고, 변기에 앉아 괜히 '바보..'하고 중얼거리게 하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니 피식 웃고 지나가는 일이 됐다. 시간은 그렇게 무섭다.
나는 '미대 나온 언니'다. 가장 잘하는 게 그림그리는 것이라는 단순한 동기로 미대에 진학했다. 우리 과 사람들은 예술대에서 가장 꼬질꼬질하게 입고 다니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그 꼬질함을 뚫고 나오는 스스로의 매력들을 믿고 있었다. 들어간 동기는 단순했어도, 이 매력적인 사람들 틈에서 같이 특별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아무리 뜯어봐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익숙한 자신의 평범함에 좌절하고, 좌절하는 모습에 또 좌절했다. 세상을 곧잘 흑백에 가져다 붙이던 평범한 젊은이었기에, 원하는 이상향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 싶기도 했다. 지난 일이니 스토너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사실, 그런 것들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니 청춘이겠지. 공식적인 청년의 테두리에 서서야 비로소 그 구절에 공감대가 생기는 걸 보면.
결혼이나 특별하게 해보자던 심보였을까. 고민들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고 갑작스레 예비 신부를 선언했다. 이른 나이가 이슈가 되긴 했지만 결혼, 임신, 출산, 이 트리오는 나를 순식간에 전형적인 삶 속으로 끌어당겼다. 스드메를 알아보고 산부인과를 다니고 그 다음에는 소아과, 어린이집... 음악, 영화, 미술에 대한 질문과 토론에서, 아이 기질에 대한 질문과 바운서냐 소서냐에 대한 토론으로 일상이 대체되어갔다. 장기자랑 하나 변변하게 해본 적 없는 밋밋한 인생이었건만, 흥 충만한 시댁을 만나 트로트 세계에 입문하고 급기야 만삭의 몸으로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나섰다. 티비 속에서 본 것 같은 삶이었다. 소소한 웃음거리들과 가끔의 갈등이 있는 드라마 속 평범한 가정.
'자기 집은 참 평범한 것 같아.' 며칠 전 툭 던진 말에 남편이 따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얼른 무마했다. '아니, 긍정적인 의미로 말야..' 결혼 전에는 몰랐다. 평범함을 사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를. 그 평범함 속에는 가족 모임 때마다 삐걱대며 장기자랑에 찬물 끼얹는 며느리에게도 기어코 환호를 보내는 시아버님의 마음, 음식이 싱거우면 심심해서 맛나다 짜면 간간해서 맛나다 해주는 시어머님의 마음, 엄마들 모임에 나타난 남편의 목 늘어난 자전거 동호회 티셔츠를 눈 감아주는 나의 마음이 담겨있다. 물론 웃으며 쉽게 말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평범한 것은 평범하지 않다. 힘든 일보다 기쁜 일에, 과거보다 현재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의 구슬들은 평범한 일상과 관계라는 실로 꿰어져 비로소 특별한 목걸이가 되었다. 그 목걸이에는 어쩌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해나가고자 하는 마음들이 들어있다. 그렇게 내게 평범함은 그저그런 것도, 흔하디 흔한 것도, 별볼일 없는 것도 아닌 위대함이 되었다. 앞으로 이 곳에 평범한 이야기들을 담아보려한다. 글을 적어 나가며 20대의 내가 집착했던 흑과 백,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색들을 탐색해나가고 싶다. 나를 만들고 지탱해주는 이야기들, 평범하기에 위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