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고 싶은데 펜은 어디에 - 첫번째
*
......하나 마나 한 말이지만 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을 나눴다. 산을 보면 산이 참 높다고, 바다를 보면 바다가 참 넓다고, 꽃을 보면 꽃이 참 곱다는 말들. 그리고 어느 날엔 이런 이야기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쓸 거야.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도록 두라는 뜻이야. 내 몸에 어떤 튜브도 넣지 말고 나를 살리겠다고 나의 가슴을 짓누르지도 말란 뜻이야.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사랑을 여기 두고 떠날 거야. 같은 말을 어진에게도 했다.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유로울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 어진아. 잘 기억해. 나는 이곳에 그 마음을 두고 가볍게 떠날 거야......
*
요즘 기분이 뭐라도 한가지에 집중하는 게 잘 안됩니다. 독서라는 분야에 한정해 보자면 조금 그렇습니다. 유튜브 숏츠 등의 짧은 토픽을 즐겨보게 되는 것과도 비슷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늘 그런 건 아닙니다. 몇주 전까지만 해도 장편소설 및 긴 책들을 꽤나 많이 몇개월동안 즐겁게 읽어왔습니다. 저는 봤던 책을 다시보기를 좋아합니다. 10년 전에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10년 전에 그어 놓은 밑줄과 메모들을 군데 군데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2025년에 새로 구한 만년필과 잉크로 또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깁니다. 간혹 짧은 일기를 쓰기도 하고 잘 모르는 부분은 정보를 찾아본 후 주석을 달아놓기도 합니다. 이 책들은 시중에 있는 책이지만 그 어느책도 나의 책과는 다르지요. 나는 나의 소중한 책을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익히 잘 아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처음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경험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시 정독 정독! 한 후 한동안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넷플릭스나 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없었던 옛날 너무나 재미있게 봤었던 영화를 다시 찾아보기도 했는데, 4K 화질로 다시 보는 옛영화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위에 한 페이지 정도를 그대로 옮겨보았는데, 여기서 어디 한번 밑줄을 그어 보겠습니다. 위의 본문 이외의 문장에서도 조금 추가되기도 합니다.
하나 마나한 말이지만 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 ㅡ산을 보면 산이 참 높다고, 바다를 보면 바다가 참 넓다고, 꽃을 보면 꽃이 참 곱다는 말들.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 송이,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최진영 작가의 글을 오늘 처음 읽었습니다. 몇몇 특정 작가를 향한 두 세달 간의 짝사랑에서 간신히 벗어나면서, 도서 대출 권수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막상 읽어보면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 책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건 짝사랑의 후유증 같은 거겠지요. 이런 상태에서 정독 도서관에서 온 문자메세지를 받았습니다. ’귀하는 9월 도서대출 우수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따라서 도서대출 권수는 기존 7권에서 10권으로 상향조정되었으며...‘
물론 지난 상반기 동안 도서대출 권수가 50권이 넘고 연체가 없었던 회원들 모두가 (총 418명) 우수회원으로 선정되었기에 그리 대단한 건 아닐 수도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도서관을 다시 찾았습니다. 무더위는 조금 물러가고 있고 하늘 높은 곳에 신기한 모양을 한 구름이 있는 아름다운 날씨였습니다.
이런 기분에서 앤솔로지를 찾았습니다. 여러 작가의 소설들을 대충대충 건너 뛰며 읽다보면 한숨 편안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손에 집힌 책이나,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장을 비우면서 펼치게 될 어떤 뜻밖의 책에서, 우연이기도 하고 필연적이기도 할 문장들이 어느순간 내 가슴을 뛰게하겠지요. 그건 경험상 예상되는 일이었습니다.
9월의 그 첫번째 ‘밑줄 긋고 싶은’ 소설로 2023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최진영 소설가님의 [홈 스위트 홈](즐거운 나의 집) 이 선정되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많이 들었나 봅니다. 본선심사를 하셨던 분들 왠만큼 과거에 많이 읽어왔던 소설가분들이었습니다. 특히 전경린 소설가님을 개인적으로 사모해왔습니다, 등의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전경린 소설가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그 고운 시선을 최진영 작가의 글에서도 만난 느낌이 있습니다. 소설의 많은 문장에서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적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