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차 직장인의 월급쟁이 졸업일기
월급을 잘라버렸습니다.
현금흐름이 중요한 시대라고 하죠.
월급은 기본이고 부업과 재테크도 열심히 해서
자산을 최대한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버티는 게 힘이고, 살아남는 사람이 승자라며
고지가 코앞인데 어딜가냐는 말씀도 하십니다.
*
저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쓰라길래
아니 왜 직업을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거지,
기자나 아나운서도 하고 싶고
선생님도 하고 싶고 작가도 하고 싶은데
왜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거냐며 투덜대던 저는
당당하게 ‘현모양처’라고 적어냈죠.
그랬더니 선생님이 웃으시며
그냥 시집가서 살림하겠다는 거냐 물으시더군요.
아, 저는 너무 해보고 싶은 게 많고
꿈이 자꾸 바뀌어서 직업을 하나로는 못 정하겠어요.
근데 현명한 엄마, 좋은 아내가 되고 싶은 거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꼭 지키고 싶은 거라서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현모양처가 왜 살림만 하는 주부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라고도 생각했었죠.
대학졸업 후,
24년간 이직을 두 자릿수로 하는 동안
일기장에 적었던 직업,
기자나 아나운서나 작가나 선생님
아무것도 못했지만
장당 원고료로 치면
베스트셀러 작가보다 높다고들 하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할 수 있었고
제 채널은 아니지만,
이제는 백만 구독자 채널이 된 연합뉴스경제 TV 개국(?) 멤버로
5년 넘게 경제방송 진행도 해오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하고 싶던 일들을
매우 운 좋게, 그리고 매우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월급쟁이,
라는 단어가 참 친근하면서도
괜히 미워 보일 때가 있어요.
피아니스트, 목수, 교수, 의사, 변호사, 플로리스트
대부분의 직업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가 들어가 있는데
월급쟁이, 회사원이란
무슨 업을 하는지에 앞서
‘월급’을 목적어로 일하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돈 벌려고 회사 가는 거지
월급 안주는 회사를 가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로 철딱서니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그냥 회사원이나 월급쟁이보다는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분석가.
내일은커녕 한 치 앞도 못 보고
맨날 틀려서 욕도 많이 먹고
‘애널’이라고 줄여 부르면 그 또한 욕 같은 그 직업이
저한테는 좋았어요.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이 아닌,
내가 궁금한 것을 직접 찾아서 분석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그걸 설명한다는 것,
그리고 투자자들과 소통한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월급쟁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나의 삶의 목적어는 월급일까.
*
똑같이 살면서 다른 삶을 꿈꾸는 건 그저 헛된 꿈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사직서를 냈습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코인으로 대박 난 거 아니냐는데
대박이 아니라 중박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게 뭐 중요할까요.
좋아하는 일을 할래요.
십 년 전쯤 저희 집 큰 남자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할 때는
참 철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제가 같은 말을 하네요.
사람 일이란 게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돌고 도는 인생, 이제는 제가 큰 남자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야 해요.
가족에게 잘합시다, 여러분
*
건설 엔지니어로 시작해 기업 컨설팅도 해보고
기업분석 주식 애널리스트를 하다가
비트코인 보고서를 쓰고 크립토 업계도 가보고
부자 고객님들 만나는 패밀리오피스 부서에서도 일해보고
대체투자 자산운용사에서도 일해봤습니다.
주식, 채권, 부동산, 코인, 대체자산을 한 바퀴 돌았네요.
누군가는 끈기 없다고 평가해도
호기심 대마왕인 저는
제 딴에 쉴 틈 없이 열심히 살았어요.
방송국도 TV, 라디오 가릴 것 없이
KBS, MBC, SBS, TBS, 매경, 한경, 조선, 머니투데이,
그리고 매주 가는 연합까지 발도장은 얼추 찍은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명함 없는 김열매로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보겠습니다.
우연히 저를 만나시거든
응원의 눈빛 한번 보내주세요.
*
이번 주 여의도 벚꽃이 너무 예뻐요.
여의도에서 서식한 지 십수 년인데
평일에 벚꽃핀 윤중로를 걸어본 게 이번 주가 처음이더군요.
어쩜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분명 매년 그 자리에서 똑같이 피었을 꽃인데도
어느 별에서 나타난 보석처럼
환하게 반짝입디다.
꽃 같은 마음, 반짝이는 순간, 빛나는 추억들로
하루하루 감사히 채울 수 있는 삶을 기도해 봅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요.